남북한-러시아 가스관 프로젝트 또 부상북한측은 여전히 MB 제안 외면하는 듯

"북한의 새 지도부는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가스관 사업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

발레리 수히닌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는 지난 2일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을 정점으로 한 북한 새 지도부가 가스관 프로젝트를 포함, 이전에 러시아와 체결한 모든 합의를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한ㆍ러시아를 잇는 러시아 가스관 프로젝트는 지난해 8월 시베리아 울란우데에서 열린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주요 의제로 부각되면서 국내외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어 작년 11월 러시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북한을 경유하는 남북한ㆍ러시아 가스관 도입 사업의 실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면서 탄력을 받았다.

가스관 사업의 로드맵에 따르면 2013년 9월부터 가스관 건설에 착수해 2016년 12월까지 공사를 마무리한 뒤 2017년부터 러시아 사할린 지역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가 북한 가스관을 통해 한국으로 공급된다.

그러나 러시아 가스관 사업은 정부도 인정했듯, 눈에 띄는 진전이 있으려면 수 년이 걸리고, 무엇보다 남북 간 신뢰 없이는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관의 활용은 난제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작년 말 남북 간에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던 러시아 가스관 사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고, 김정일 위원장 사망을 전후해 남북관계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물건너 간 얘기로 치부돼 왔다.

그런 상황에서 수히닌 대사의 입을 통해 다시 러시아 가스관 사업이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히닌 대사의 발언 대로라면 그간 중단됐던 남북한ㆍ러 가스관 사업이 재논의되고 희망섞인 기대도 가져볼만 하지만 남과 북, 러시아에 정통한 복수의 소식통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지난해 8월 울란우데에서 이뤄진 김정일-메드베데프 회동에서 러시아 가스관 프로젝트가 의제로 등장한 것과 유사한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가스관 사업은 남북 교류의 상징적인 명분일 뿐, 실제는 남북 핵심 인사들 간의 접촉에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남과 북의 정상들이 접촉하는 무대를 마련하고 본 공연(접촉)을 눈가림하기 위해 가스관 사업이라는 연막용 보조공연을 펼쳤다는 해석이다.

러시아 외교가의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이 북ㆍ러 정상회담을 위해 울란우데로 향했을 즈음 이명박 대통령 일행은 중앙아시아 3국 순방에 나섰는데, 러시아의의 한 소도시에서 남북 핵심 관계자들의 접촉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당시 남북관계자들이 경협을 토대로 정상회담까지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이러한 남북 접촉이 가능한 것은 러시아가 지닌 북한에 대한 '힘'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북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쥐고 있는 군부 및 무기체계가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도 러시아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 때는 러시아측 제안으로 바이칼호와 인접한 이르쿠츠크에서 남북한과 러시아 3자 정상회담이 추진된 적이 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막역한 관계인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전 러시아 대통령 전권대표(현 극동러시아 군사학교장)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하고 러시아 모처에서 남북이 회동할 수 있게 된 데는 한국 측이 러시아에 건넨 상당한 '거마비'도 한몫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거마비는 남북한ㆍ러시아 가스관 연결사업과 관련해 계약금 명목으로 지불됐다고 하는데, 한국가스공사 측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최근 수히닌 대사가 러시아 가스관 사업을 언급한 것은 그러한 남북ㆍ러시아 3국 간 특수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즉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뒤 북한과 관계개선을 모색해온 정부가 난관에 부딪히자 다시 '러시아 카드'를 꺼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지난 1월 9일 중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일행이 북측 관계자들과 접촉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보려는 시도가 좌절된 게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임기 말의 이 대통령 입장에선 여러 국정 프로젝트가 시비거리에 오르고 공약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데다 각종 친인척 비리로 레임덕 현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통한 국정 반전은 이전보다 더 절실하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 정부의 '러시아 카드'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북한이 러시아 눈치 때문에 함구하고 있을 뿐 MB 정부의 대북 제안에 고개를 돌렸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이같은 북한측 태도는 지난 1월 베이징 남북 접촉에서 MB 정부의 '진정성'을 문제삼은 것의 연장선에 있다고 풀이했다.

국내 여러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이 대통령의 제안을 북한이 끝내 외면할 지, 아니면 '러시아 카드'가 일면 효험을 발휘할 지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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