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블랙리스트 제도(휴대폰 자급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6월 통신사 중심의 폐쇄적인 유통구조 개선방안으로 내놓은 블랙리스트 제도를 다음 달 1일부터 본격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년 동안의 휴대폰 유통구조가 전면적으로 바뀌는 만큼 휴대폰 제조사, 통신사들은 저마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책 마련에 부심 중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통신비 인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방통위의 예상이 빗나갈 것이라 전망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휴대폰 유통구조 대격변

블랙리스트 제도란 통신사가 분실이나 도난 등으로 사용 불가능한 휴대폰의 고유번호만 따로 관리하는 것으로 미국ㆍ유럽 등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20년 이상 유지해왔던 화이트리스트 제도는 모든 사용 휴대폰의 고유번호를 리스트화해 관리하는 것으로 그간 통신사들이 휴대폰 지배력을 유지하는 근거가 돼왔다. 유심카드 및 가입정보에 문제가 없어도 통신사에 고유번호가 등록되지 않은 휴대폰은 사용할 수 없었다.

화이트리스트 제도로 인해 그동안 삼성, LG, 팬택 등 휴대폰 제조사는 통신사와 협의해 출고가격을 정해 공급하고 소비자는 통신사 대리점을 통해서 요금제에 가입해야만 비로소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었다. 휴대폰 가격결정 및 유통망을 통신사가 간섭하고 있는 까닭에 출고가 거품, 과한 보조금 지급 등 왜곡된 유통구조가 만들어져 왔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돼 휴대폰 제조사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고 통신사는 요금제와 유심칩만 판매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장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휴대폰을 살 수 있는 곳이 다양해져 대형마트는 물론 해외에서 사온 휴대폰에도 유심칩만 끼우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도난이나 밀수입 휴대폰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모든 휴대폰을 자유롭게 개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가격경쟁상황에 새롭게 놓인 휴대폰 제조사는 무작정 고가의 출고가를 고집할 수 없게 되고 요금제와 약정도 휴대폰 구매와 무관해져 소비자의 선택권이 늘어나게 된다. 또한, 제조사는 소비자의 필요에 맞는 휴대폰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통신사는 서비스 품질, 통신요금의 다변화에 힘쓸 수 있게 된다.

제조사ㆍ통신사 "바쁘다 바빠"

지난해 방통위에서 블랙리스트 제도 도입에 대해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밝히자 통신사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통신사들은 반대이유에 대해 ▲망 연동 테스트를 하지 않은 해외 휴대폰이 네트워크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휴대폰 분실 시 찾기 어려워지며 ▲제조사와 함께 만들어 온 요금제 결합상품 운영이 힘들어지고 ▲휴대폰 구매가격이 증가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방통위는 ▲외국인들에게 제공하는 로밍 서비스가 아무런 장애 없이 제공되고 있고 ▲화이트리스트 제도를 쓰는 지금도 사실상 분실 휴대폰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통신사와 제조사가 분리되면서 더 다양한 요금제가 나올 수 있고 ▲약정을 하고서라도 통신사 보조금 혜택을 원하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블랙리스트 제도 도입을 강행했다.

결과적으로 블랙리스트 제도 도입 한달 전인 현재 휴대폰 제조사, 통신사들은 저마다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휴대폰 제조사들은 유통망 확충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당장 5월부터 삼성 모바일샵 40여개, 디지털프라자 직영점에서 300여개에서 휴대폰을 판매한다. 삼성 모바일샵은 올해 안에 100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LG전자도 LG 하이프라자에서 운영하는 베스트샵 직영점 250여개에서 휴대폰을 구매하면 바로 개통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했다. 이와 별도로 모바일 전문 매장을 개설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팬택은 아예 기존 IT 액세서리 유통브랜드인 '라츠'를 강화, 신설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지난달 마케팅 독립법인 설립을 위한 태스크포스팀까지 구성하며 얻어낸 결과다. 자본금 100억원과 임직원 100여명으로 시작한 라츠는 휴대폰을 포함한 IT 디바이스 유통 및 총판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통신사들도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SK텔레콤과 KT는 소비자가 믿고 휴대폰을 구입할 수 있는 인증제를 도입하는 한편 휴대폰을 직접 사용해볼 수 있는 체험형 카페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양사는 중고폰 유통망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SK텔레콤이 지난해 7월부터 중고폰 매매 서비스인 'T에코폰'을 서비스하고 있고 KT도 지난달부터 '올레 그린폰' 서비스를 시작했다.

특히 KT는 최근 통신사로서는 처음으로 유심칩이 없는 공휴대폰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공식 매장인 올레마켓을 통해 갤럭시노트, 갤럭시S2 HD LTE, 옵티머스LTE 태그, 베가LTE M, 아이폰4S 등 5종의 스마트폰을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블랙리스트 제도 시행에 맞춰 고객 접점을 높이고 휴대폰 제조사가 직접 판매를 시작하기 전에 사전 포섭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또한, 통신사들은 블랙리스트 제도 시행에 대비한 전산작업을 거의 마친 것으로 보인다. 보조금이 없고 약정과 이용조건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오픈 요금제를 설계, 금액 등 세부사항을 계획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조금과 약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약간 저렴해지지만 음성과 SMS 이외에는 이용이 제한된 선택적 요금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실제 통신비 인하로 이어질까?

블랙리스트 제도가 시행돼서 유통구조가 다변화되면 실질적인 통신비 인하로 이어질 수 있을까? 많은 통신 전문가들은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돼도 한동안은 큰 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아이폰4S, 갤럭시노트 등 소비자들이 주로 찾는 최신 스마트폰들은 100만원 내외의 높은 가격 때문에 일시불로 구입하는 데 부담이 크다. 현재 일부에서 판매되고 있는 공휴대폰도 출고가에 비해 5만원 가량 비싼 가격에 유통되고 있다. 대다수 소비자들이 당분간은 약정을 걸고서라도 통신사를 통해 할부로 구매하는 방식을 선호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이유다.

방통위에서는 대형할인점이나 편의점 등 대기업 유통채널이나 MVNO 업체들을 통해 다량의 휴대폰이 유통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 또한 할부금과 보조금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통신사와 경쟁하기에는 막대한 부담이 따른다. 휴대폰 제조사가 통신사에만 최신 스마트폰을 납품하고 여타 유통채널에는 보급형 휴대폰을 내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빈약한 재무구조를 지니고 있는 MVNO 업체들은 마케팅비를 감당하기도 만만치 않다.

통신비 인하를 목표로 방통위가 야심차게 내놓은 블랙리스트 제도가 도입과 동시에 유명무실해지진 않을지 통신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