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업 승계의 현주소

산상속 실패율 70% 상속세 못 내서 기업 처분도
한국선 부정적 시각 많고 가족기업 경영권 인정제도 無
미국·일본엔 차등 의결권도
가업승계 이뤄지더라도 정부서 10년간 엄격관리
일정기간 업종변경 등 못해 CEO 입장에선 살얼음판

손톱깎기 세계 1위 회사였던 쓰리세븐. 창업주 김형주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자손은 상속세 약 150억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쓰리세븐 경영권은 2008년 중외제약으로 넘어갔다.

해외 가족기업 전문연구소에서 일했던 건국대 남영호 교수는 가업 승계가 3대를 거쳐 이뤄지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가족 기업 연구 대가인 레온 댄코 박사는 가족 기업 가운데 2세대까지 생존하는 기업은 30%, 3세대 이상 이어지는 사례는 13%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포춘코리아는 3월호에 '가업 승계의 성공 방정식'이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한국 경제의 풀뿌리 노릇을 해온 중소 가족 기업이 어떻게 가업을 승계하는지 조명했다.

한국가족기업연구소 김선화 소장은 2008년 미국 출장에서 가업 승계 관련 논문을 읽었다. 가업 승계라고 하면 한국에선 소유권 이전에 따른 상속세가 문제지만 미국과 유럽에선 가업 승계 목표가 가족끼리 어떻게 협력해 기업을 발전시키느냐에 맞춰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60~70년대 설립된 중소기업이 2세 승계를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가업 승계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상속세 여부에 관계 없이 세대 간 재산 상속 실패율은 약 70%. 김선화 소장은 절세만으로 부를 상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가족 기업은 대다수 상속세와 증여세 부담으로 허덕여 경영권이 흔들린다. 남영호 교수는 "상속·증여세 비율은 최고 50%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상속세를 못 내서 아예 기업을 처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포춘코리아가 중소기업중앙회 가업 승계지원센터를 통해 조사한 결과 3대까지 가족 기업을 유지한 중소기업은 성남기업을 포함해 이구산업, 오성섬유공업, 영림목재 등 4곳에 불과했다. 남 교수는 "가족 기업이 장수하려면 가업 승계 개념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일반 기업은 주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가족 기업에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면서 "가업을 승계하는 일이 재산을 물려받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실패할 소지가 크다. 창업자 경영 철학과 기업가 정신을 물려받는 게 가족 기업에서 진정한 가업 승계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삼성 등 한국 대기업은 외국에서 가업 승계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족 기업은 가훈이 사훈으로 발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 교수는 "삼성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이 정한 가훈 인재제일, 사업보국, 합리추구가 삼성그룹 사훈으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에선 아직까지 가업 승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등이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가 꽤 많다. 남 교수는 "한국과 달리 미국, 일본 등은 오너의 차등 의결권을 인정해준다"고 밝혔다. 차등 의결권 제도는 오너 가족이 가진 지분 1%가 의사결정에서 지분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정하는 제도적 장치다. 한국에선 가족 기업 경영권을 인정하는 제도가 없다.

중소기업중앙회 소속 중소기업 사장 3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사장의 평균 나이는 50대 후반이었고 주로 제조업을 운영했다. 이들은 가업 승계와 관련해 주로 변호사와 세무사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중소기업중앙회 가업승계지원센터 이창호 센터장은 "그동안 가업 승계와 관련해 중소기업의 속사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본 자료가 거의 없었다. 지난해 12월 조사한 중소기업 가업 승계 실태조사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한국조세연구원과 함께 지난해 11월 2일부터 12월 8일까지 중소기업 가업 승계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중소기업 CEO 가운데 314명이 이번 조사에 참여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1차로 설문지 조사를 진행하고 거기서 도출된 정보를 바탕으로 전화조사까지 실시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조사 결과를 도출했다.

가업 승계가 실제 진행됐거나 계획단계에 있는 기업 CEO 평균 연령은 56.3세로 나타났다. 60대 이상이 43.8%로 가장 높았고, 50대가 30%, 40대가 12.5%였다. 창업 1세대가 오랜 경영 활동을 정리하고 2세대에게 가업을 물려주려는 시점이 대략 50대 후반부터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14명의 CEO 중 절반이 넘는 53.5%가 제조업을, 26.8%가 건설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창호 센터장은 "대부분 국내 중소기업의 업종은 제조업이고, 제조업 기업 창업자는 가업 승계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 조사대상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30년 이상 업력을 자랑하는 제조업체 CEO들이었다. 이미 가업 승계에 들어간 기업의 경우 75%가 제조업일 정도로 다른 업종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여주었다.

중소기업의 가업 승계는 선발주자인 창업자가 후계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일이다. 바통터치가 효과적으로 이뤄지려면 CEO 스스로 은퇴시기를 적절하게 결정해야 한다. CEO 314명이 희망하는 은퇴 연령은 평균 66.3세였다. 60대에 은퇴하고 싶다는 응답이 44.9%로 가장 높았다. 70세 이상도 41.1%나 나왔다. 특히 30년 이상 재임한 장수 CEO는 은퇴시기를 70대 이후로 잡는 경향이 가장 강했다. 가족기업연구소 김선화 소장은 창업자의 은퇴시기가 가업 승계에서 결정적인 요소라고 역설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오너 CEO가 은퇴시기를 늦추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쉽게 떠날 수가 없는 거죠. 승계 적기를 놓치면 후계자 승계가 힘들어지고 후계자의 리더십이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여유가 있을 때 물러나 후계자를 후방에서 적극 지원하는 게 옳은 길입니다." 가업 승계를 통해 창업자는 은퇴설계를, 후계자는 경영설계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얘기다.

CEO는 가업 승계 시기가 임박하면 후계자 의사를 묻는다. 가업을 승계할 생각이 있는 대표이사 179명 가운데 31.3%가 승계 대상자의 의견을 가장 고려한다고 대답했다. 가족 의견과 기업 내부 직원의 의견을 경청한다는 응답자는 각각 23.5%. 이밖에 15.6%가 회계사 등 전문가 의견을, 6.1%가 동종업계 CEO 의견을 우선 들어본다고 밝혔다.

후계자를 선정할 땐 당사자 의사를 확인하지만 후계자를 평가할 땐 매출이 우선이었다. CEO 53.6%가 후계자의 기업매출 성과를 선정의 핵심 요소로 꼽았다. 21.8%는 자신과 후계자의 경영마인드 일치 여부를, 21.2%는 주변의 평가를 가장 우선시한다고 말했다.

아들이라고 무조건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인천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한 기업가는 "(아버지가) 처음 가업을 물려주신다고 할 때 거절했다. 중소기업 CEO 자리가 고통스럽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보면서 자랐다. 대신 외국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가업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70대에 접어든 한 CEO는 익명을 전제로 "자식이라도 제대로 능력을 못 갖추면 회사 임원에게 기업을 물려줄 생각이다"고 귀띔했다.

사업장 규모 50인 이상, 매출액 101억 원 이상인 중소기업 CEO의 경우 변호사, 세무사 등 전문가에게 가업 승계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얻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가업 승계 의향이 있는 179명의 CEO 가운데 45.3%가 법률 관계자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답했다. 규모가 큰 중소기업이 증여세 등 법적 이슈에 더 민감하다는 얘기다. 가업 승계가 진행 중인 한 CEO는 "(증여세나 상속세 같은) 세법 문제는 거의 세무사한테 맡겨버린다"고 말했다.

이들은 법적 문제 외에도 재정 관련 자문을 중시하고 있었다. 익명의 CEO는 덧붙인다. "보험사나 은행에서 컨설팅 자료를 자주 보내옵니다. 거기서 도움을 받는 편입니다." 실제 CEO들은 가업 승계 정보원으로 컨설팅기관(12.8%)과 은행의 자산관리 전문가(5.6%)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업 승계의 실전 단계에 들어서면 CEO는 자발적인 정보 검색보다 전문가의 조언에 거의 의지하게 된다. 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익명의 CEO는 "학교에서 만난 사업하시는 분들이나 주변 지인들로부터 가업 승계에 성공하신 분들 얘기를 많이 듣는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결과 179명의 CEO 가운데 자발적으로 가업 승계 관련 정보를 찾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경영관련 전문잡지(12.3%)나 인터넷(0.6%)에서 주로 정보를 찾는 것으로 조사됐다.

포춘코리아와 인터뷰한 지방 건설업체 전 CEO는 "한창 잘되던 회사였는데 세금이며 법적 문제며 생각하기 복잡한 게 많아 사업을 그냥 접었다"고 말했다. 다른 익명의 CEO는 "아들이 사업에 대해 관심도 없다고 하니까 가업 승계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가업 승계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응답한 151명의 CEO 중 36.4%는 법ㆍ제도상의 제약을 지적했다. 최대 50%에 달하는 상속ㆍ증여세율은 가업 승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세금을 내기 위해 공장의 기계나 건물을 내다 팔아야 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는 게 현실이다. 막상 가업 승계가 이뤄져도 정부에서 10년이나 엄격하게 사후관리를 하기 때문에 CEO 입장에선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경영을 유지해야 한다.

이창호 센터장은 "상속 이후 일정기간 동안 업종 전환이나 자산 처분을 금지하고 있다. 필요할 경우 유사한 업종으로 바꾸고, 자산도 팔았다가 재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사후관리라는 명목 아래 기업 경영의 손발을 묶고 있는 셈이다"고 설명했다.

가업 승계에 있어 후계자가 문제 되는 사례도 있다. 151명의 CEO 중 35.1%는 후계자의 역량 부족을, 12.6%는 후계자의 승계 거부를 가업 승계의 걸림돌로 지적했다. 결국 법ㆍ제도적 측면과 승계 대상자의 불확실성이 가업 승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란 얘기다. 특히 가업 승계에 대해 의향이 없는 기업일수록 후계자의 역량 부족에 대한 고민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실제 가업 승계가 진행되면 결국 법ㆍ제도상의 제약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승계를 완료했거나 거의 막바지에 들어선 29명의 CEO 가운데 75.9%가 법ㆍ제도상의 제약에 문제점이 가장 많다고 강조했다. 이들 가운데 6.9%와 3.4%만이 각각 후계자의 역량 부족과 후계자의 승계 거부를 큰 걸림돌로 꼽았다.

문제는 가업 승계의 실패가 한 가문의 문제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소기업 CEO는 "그냥 회사를 팔고 나가버리면 그동안 나랑 같이 일해 온 사람들 설 자리가 없어지잖아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업 승계의 실패는 직원들의 안정적인 고용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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