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누비는 '의지의 한국 기업인' 5인방

자수성가형 부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이다. 대기업이 웬만한 사업들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어서다. 불황이 장기화 됨에 따라 성공을 보장받지 못하리란 위기감이 조성된 것도 한 원인이다. 그만큼 세인들은 자수성가형 부자들의 성공기에 목말라 있다.

그러나 해외로 눈을 돌리면 맨땅에서 거대기업을 일궈낸 이들이 적지 않다.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자리매김하는가 하면, 이들의 성공사례가 최근 주요 외신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자국에서도 이루기 어려운 성공을, 먼 타국 땅에서 당당히 이뤄낸 의지의 한국인들. 그들 중 ▦창업1세대 ▦소수계 100대 기업 ▦업계 1위 기업 등 3개 항목 가운데 2개 이상을 만족하는 인물을 조명해봤다.

값싼 1회용 옷 전략 적중… 전세계 500개 매장·연 4조 매출

머나먼 이국 땅에서 눈부신 성공을 이룬 '의지의 한국 기업인'이 적지 않다. 가 그 대표적인 예다. 장 창업주는 맨땅에서 순자산 5조원의 글로벌 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부자다. 포에버21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패션 체인 기업으로 미국 내 한국기업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장진숙 포에버21 창업주
장 창업주는 1981년 남편인 장도원 포에버21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부는 접시 닦기, 주유소 점원, 사무실 청소 등 바닥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주 3년 만에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포에버21 첫 매장을 열었다.

장 창업주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저렴한 가격의 패션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겨냥했다. 사업 아이디어를 두 딸에게서 얻었다. 어린 두 딸의 때 묻은 옷을 자주 갈아 입히면서 '세탁비도 만만치 않은데 입고 버릴 만한 값싼 일회용 옷은 없을까'라는 생각이 사업으로 연결된 것이다.

장 창업주의 전략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첫해 3만5,000달러였던 매출을 이듬해 70만달러로 수직상승했다.

포에버21은 현재 미국을 비롯해 영국, 캐나다, 일본 등 전 세계에서 50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명동과 압구정에도 매장이 있다. 직원 수는 4만여명에 달하며 지난해 매출액은 4조5,000억원으로 예상된다.

포에버21은 또 스페인의 자라, 스웨덴의 H&M, 일본의 유니클로 등 세계적인 패스트(fast) 패션 브랜드들과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패스트 패션이란 제조업자가 제조ㆍ유통ㆍ판매를 모두 담당해 저가의 상품을 2~3주에 한 번씩 빠르게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춘 패션을 말한다.

홍 패트릭 뱅크카드서비스 사장
장 창업주는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값지게 사용해 주변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장 창업주는 필리핀의 교육 시설 건립을 위해 340만달러를 기부하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고 있다.

아무도 몰라주던 스마트 카드 올인… '아메리칸 드림' 산증인

도 '아메리칸 드림'의 산증인이다. 빈손으로 20년 만에 외형 8,100만달러 규모의 회사를 키워냈다. 뱅크카드서비스는 도소매업소를 대상으로 일정 수수료를 받고 신용카드의 전반적인 프로세싱을 처리ㆍ진행ㆍ관리하는 회사다.

홍 사장은 군복무를 마친 1984년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떠났다. 군생활 중 이민을 간 가족을 찾아서였다. 미국에서 홍 사장은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회사들은 일자리를 주었지만 홍 사장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홍 사장은 청소, 페인트칠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번번이 회의가 들었다. 비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당연한 자각이었다. 이에 홍 사장은 1986년 가족들을 설득해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다.

김태연 TYK그룹 회장
그리고 홍 사장은 6개월여 동안 광고 판촉 회사에 몸 담았다. 당시 같은 건물을 쓰던 한 미국인이 신용카드를 카본 카피 종이에 대고 밀던 단말기를 팔고 있었다. 흥미를 느낀 홍 사장은 도서관을 뒤져서 당시에 막 등장했던 스마트 카드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던 중 독자적인 응용프로그램을 칩에 담으면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때마침 직원들과 싸우며 회사 운영에 힘겨워 하던 옆 사무실의 미국인으로부터 단말기 세일즈 분야를 넘겨 받았다.

홍 사장은 아무도 몰라주던 사업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했다. 9년 동안 개인적인 소득이 사실상 전무했다. 1994년 무렵까지만 해도 터미널 세일즈 회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야 비로소 사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99년 무렵엔 회사다운 조직과 체계가 마련됐고, 이듬해인 2000년부터는 신문광고 등으로 대외 홍보를 조금씩 하면서 회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회사는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그리고 뱅크카드서비스는 연매출 8,100만달러에 15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가맹점 서비스회사로는 미국에서 상위 15위권에 꼽힌다. 앞으로 3년쯤 뒤 나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준택 요거트랜드 대표
"곰팡이 없앨 수 있다면…"'캔두' 정신으로 1억달러 신화

'실리콘밸리의 신화'로 통하는 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김 회장은 연매출 1억달러인 클린룸솔루션 업체 라이트하우스의 CEO다. 미용분야의 엔젤힐링, 인터넷 분야의 모닝플래닛, 데이더스토어, 엑스닷컴을 거느린 TYK그룹의 수장이기도 하다. TYK는 김 회장의 영문 이니셜이다.

김 회장은 22살인 1968년 미국으로 떠났다. 아버지의 갖은 구박을 피해서였다.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루 세끼를 수제비만 먹어야 할 정도였다. 청소부ㆍ웨이트리스ㆍ주유소 직원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고생만 하던 김 회장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건 태권도였다. 어릴 적 삼촌에게 배웠던 태권도가 미국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김 회장은 인근학교를 찾아가 무작정 태권도를 가르치게 해달라고 졸랐다. 한 달을 매달린 끝에 김 회장은 결국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김 회장은 태권도를 통해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실리콘밸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무작정 아이들을 데리고 실리콘밸리로 갔다. 그곳에서 코멕이라는 회사를 방 한 칸에서 시작했다.

조순 시드멕스 대표
그러던 1982년 김 회장은 라이트하우스 창업하게 됐다. 청소부로 일하면서 빌딩이나 집안 구석구석에 피어 오르는 곰팡이를 보며 '저런 것을 모두 없앨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기반이 됐다. 창업 이후 회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했고 클린룸솔루션 업계 1위에 자리매김했다.

라이트하우스의 성공은 김 회장 특유의 리더십이 바탕이 됐다. 회사 곳곳에는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라는 슬로건이 붙어 있다. '그가 할 수 있고, 그녀도 했다면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김 회장은 이를 '캔두(Can Do)' 정신이라 부른다고 한다.

부친 병환 치료 미국행… "줄서서 먹는 요거트" 초고속 성장

는 단기간에 세계 요거트 업계 1위에 군림한 주인공이다. 장 대표는 요거트 사업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미국, 일본, 멕시코, 필리핀, 괌 등지에 200여 개의 매장을 가진 기업의 CEO로 성장했다.

장 대표가 미국행을 결심한 건 부친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장 대표는 아버지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 등 가정의 생계를 위해 봉제공장, 주류배달, 세탁소 등 잠 잘 시간도 없이 일자리를 전전했다.

김효준 BMW 사장
그러던 중 발을 들인 IT 업계에서 장 대표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15년 동안 몸을 담았다. 그러나 끊임없는 밤샘작업으로 건강에 무리가 왔고, 아내의 권유대로 안정된 수입원을 만들어 보고자 프랜차이즈 사업을 결심했다.

사업을 위해 장 대표는 2년 동안 50개가 넘는 매장을 둘러봤다. 이 과정에서 프로그래머의 경험과 지식을 살렸다. 맛과 가격차이, 매장 디자인은 물론, 직원들의 생김새까지 분석했다. 또 이에 따라 매출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데이터화하고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2001년 LA 한인타운에 처음으로 버블티 매장을 열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음료 사업이 생소했던 당시 장 대표의 사업은 대표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되기도 했다. 3년 동안 문을 연 매장은 33개나 됐다. 하지만 4년 정도가 지나자 매상은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이때 장 대표는 요거트를 전망 있는 아이템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2006년 첫 점포의 문을 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손님들의 줄이 끊이질 않았다. 줄을 서면서까지 요거트를 사 먹는 장관이 연출되자 미국의 언론도 그를 주목했다.

미국 메이저 브랜드가 성장하는 데 8~9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비해 '요거트랜드'는 불과 4년 만에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미국을 비롯해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200개의 매장을 가진 프랜차이즈로 자리매김했다.

눈 여겨 볼만한 점은 100개 매장이 문을 여는 동안 문 닫은 매장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는 점이다. '모든 프랜차이즈가 같이 성공해야 한다'는 장 대표의 신념이 이뤄낸 결과다. 미국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요거트랜드는 오픈하면 절대 문을 닫지 않는다'는 인식이 성립될 정도였다.

선발주자·복잡한 세법 뚫고 브라질 무역시장 블루오션 개척

는 브라질에서 연매출 5억 달러의 무역기업을 일궈냈다. 시드멕스는 상파울루 중심가에 위치한 브라질 100대 기업이자, 무역 분야 4위의 기업이다.

조 대표는 1985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그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공부에 크게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조 대표는 대학교 1학년 때 중퇴를 한 후 통관회사에 취업했다.

조 대표는 브라질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입, 수출, 통관 절차를 대행해주는 무역 서비스 회사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2003년 친구이자 동료인 여인진 대표와 함께 '시드멕스'를 창업했다.

창업 당시 이 분야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수십억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선발주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년 세법이 바뀌고, 통관 절차가 복잡해 사양 산업이라 불렸다. 당연히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그럼에도 조 대표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브라질 무역업에서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시드멕스는 무역업에 뛰어든 지 불과 10년 만에 연매출 5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2003년 창업 당시 매출액인 500만 달러와 비교하면 10년 사이 100배의 성장을 달성한 셈이다. 5명이던 직원도 현재 270여 명으로 늘었고, 브라질 안에만 6개의 지사를 거느리고 있다.

브라질 주류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성공한 사업가가 된 조 대표의 새로운 목표는 5년 안에 매출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비즈니스맨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장 대표의 또 다른 꿈이라고 한다.

"한국식 버려라? 오히려 악바리 근성 있어야"


외국계 기업 CEO 성공 비결

송응철기자

, 모진 다논코리아 사장, 박남희 와나코코리아 사장…. 외국계 기업에서 최고경영자(CEO)로 활약 중인 한국인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외국계 기업에서 CEO까지 도약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흔히 해외기업의 업무 방식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헤드헌팅업계는 한국적 스타일을 아예 버려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한 헤드헌팅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기업은 철저하게 성과와 업무 능력으로 평가한다"며 "한국인 고유의 악바리 근성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에서의 승진 경쟁은 치열하다. 한국의 인재뿐 아니라 글로벌 인재와 맞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 대부분이 재무를 담당하는 CFO에는 한국인 임원보다 외국인 본사 임원들이 즐비한 것이 냉혹한 경쟁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헤드헌팅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기업에서 임원을 한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김효준 사장이나 모진 사장 등도 한국인 특유의 업무 성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성과를 창출해 왔기 때문에 지금의 CEO 자리에 앉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은 최근 들어 외국계 기업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시장에서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한국식 운영 시스템과 마인드가 필요하단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는 "결국 국내 기업에서 한국식 실무와 경영 마인드를 두루 익히고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을 한다면 주요 임원으로 오르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