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 새정부 출범 앞두고 사정기관 '살생부' 나돌아

검찰이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고발사건의 전담 부서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기업들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청사 전경. 주간한국 자료사진
국세청 고강도 세무조사… 공정위 '대기업 전담' 검토
H기업 납품단가 부풀리기…
S기업 역외탈세 방법 등 비자금 조성 검찰 내사

기업들 "전혀 모르는 일" 수사대비 내부단속 들어가 재계
'재벌 군기잡기?' 경제민주화 바로 세우기
'재원확보 차원' 분석도

재계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 대기업 '사정 리스트'가 설득력 있게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기관 안팎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내사는 사실상 종결되거나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사정 리스트는 차기 정부의 출범에 발 맞춰 이르면 3월에서 4월 중에 공개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리스트에는 국내 유수 기업들의 사명(社名)이 빼곡히 적혀 있다. 당연히 이름이 올라간 기업들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혐의들이 모두 기업 총수들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더욱 그렇다. 재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사정기관의 '살생부'를 들여다봤다.

내사설에 초긴장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불공정행위를 막기 위한 전담조직 신설을, 국세청은 고강도 기업 세무조사를 각각 예고하며 대기업들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2007년 12월28일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재계는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17대 대선 승리 열흘 만에 가진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과의 간담회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친기업주의)'정책을 선언하고 나선 때문이다. 앞서 10여년간 정부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했던 기업들에는 최고의 낭보였다.

그러나 차기 정권 출범을 코앞에 둔 지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온데간데 없고 재계를 겨누고 있는 사정기관들의 칼끝이 예사롭지 않다.

먼저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불공정행위를 막기 위한 전담조직 신설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대기업 집단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선 일감 몰아주기와 통행세 문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대기업의 내부거래를 통한 계열사 부당지원, 경영권 승계를 위한 내부거래 등이 주요 타깃이다.

국세청도 양팔을 걷어붙였다. 고강도 기업 세무조사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새다. 국세청은 최근 세무조사와 체납 징수 업무에 500명을 추가로 투입하기로 하는 등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예고하고 있다.

검찰 역시 보폭을 크게 하고 있다. 검찰은 공정위 고발사건의 전담 부서를 신설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공정위의 대기업 고발 건수가 급증하리란 관측에서다. 신설되는 부서의 수사 대상은 대기업의 계열사 부당지원과 총수의 관련성 등이다.

사정기관은 이처럼 재계에 전방위적 압박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정기관 안팎에선 기업들의 간담을 한층 서늘하게 만드는 소식들이 무성하다. 표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행보 외에 사정기관들이 은밀히 내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기관들은 수개월 전부터 횡령, 비자금, 특혜, 로비 등 기업들의 고질적인 비리 첩보를 입수, 비밀리에 내사를 진행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기업들이 도마에 오르내렸다. 사정기관 안팎에선 다음 수사 대상이라는 기업들의 실명이 거론되고 있다.

총수 관련 비리 내사는 완료

사정기관이 우선 정조준한 기업은 5개 정도로 압축된다. 먼저 S기업은 해외 수출을 담당하는 계열사를 통한 역외탈세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S기업의 비자금 중 일부가 오너의 개인 용도로 사용된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S기업에 대한 내사를 사실상 완료한 상태다.

H기업도 해외 현지법인의 수입 부품 거래 과정에서 납품 단가를 부풀리는 수법 등으로 수백억원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국세청의 내사를 받았다.

일련의 과정엔 오너가의 특수관계인이 깊숙이 개입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은 이미 H기업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검찰 고발과 세수 추징만 남은 상태다.

또 다른 S기업은 오너가의 횡령, 비자금 조성 혐의와 관련해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다. 내사가 아직 종결되진 않았다. 그러나 마무리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S기업 오너가의 측근이 구체적인 비자금 조성 수법과 함께 회사 내부의 회계자료 등 관련 서류 일체를 검찰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P기업은 회장과 측근, 계열사에 대한 검찰 내사를 받고 있다. 리베이트와 입찰비리, 특혜, 횡령 등의 혐의 때문이다. P기업의 내사는 마무리 단계. 검찰은 현재 측근과 계열사에 대한 사정을 마치고, 회장에 칼끝을 겨누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H기업 역시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다. D증권사를 통해 거액의 비자금을 형성한 혐의다. H기업은 그 대가로 그룹 계열의 광고대행사와 광고계약을 체결하고 비용을 부풀려 D증권사에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설에 대한 기업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먼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검찰의 타깃이 되고 있다는 얘기는 근거 없는 낭설"이란 것도 공통된 답변이다.

이 같은 답변과 달리 실제로는 적잖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 가운데 하나다. 실제, 사정기관의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기업들은 소문의 진위와 검찰의 동향을 파악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됐을 때를 대비해 기업들이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는 뒷말도 들린다. 특히 검찰의 내사작업이 총수 쪽에 집중돼 있어 기업들의 충격과 우려는 클 수밖에 없다.

군기잡기? 곳간 채우기?

사정기관은 해당 기업들에 대한 내사를 대부분 마무리 지은 상태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 시간만 조율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 시기는 3, 4월로 전망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정기관이 기업들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고, 수사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까닭은 뭘까. 이를 두고 재계에선 ▦재벌 군기잡기 ▦경제민주화 기조 ▦곳간 채우기 등의 '설(說)'들이 나돌고 있다.

먼저 '오픈' 시기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재벌 군기잡기'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사정기관의 압박을 통해 차기 정부가 강조한 대ㆍ중소기업 상생과 투자ㆍ고용 확대정책에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재계의 군기를 잡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정기관을 동원하는 것"이라며 "재벌들의 충성을 맹세 받기 위한 움직임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경제민주화 기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는 얘기도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면서 대ㆍ중소기업간 양극화 해소와 재벌의 잘못된 관행 개선의 필요성에 목소리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MB정부에서 재벌들은 사실상 면죄부를 받아왔다는 지적이 높았다"며 "차기 정권이 이런 비판을 털어내기 위해 사정기관을 동원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의 공약 실천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서라는 얘기도 있다. 박 당선인의 공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어느 때보다 올해 세수에 목마른 상황이다. 세계 경기 침체 등 대외악재로 세입여건은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게다가 내수가 살아나지 않을 경우 세입예산의 큰 덩어리인 법인세와 부가가치세수입은 자연스럽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한 재계 관계자는 "박 당선인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재원을 확보하겠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해법은 덩치가 큰 대기업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재계는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추측일뿐 세무조사의 배경이 무엇인지, 어디까지 확산될지에 대해선 전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재계는 잔뜩 웅크린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차기 정권의 시작과 맞물려 재계엔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기업들은 비상 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