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고 끙끙… 남군도 괴로워요"피해자 넷 중 하나 남군 수치심에 고발 꺼리는 사례 많아올 상반기 기소율도 고작 31.5%강기윤 의원 "군검찰 솜방망이 처분… 대군 신뢰도 하락 우려스럽다"'오 대령 사건' 법원 판결 주목

군대에서 상급자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입은 남군들은 수치심이나 2차 공격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고발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이혜영 기자
2010년 7월 10일 새벽 1시. 해병대 2사단 운전병 이모(당시 22세) 상병은 자신의 참모장인 오모(당시 47세) 대령을 태우고 관사로 향했다. 술에 취한 오 대령은 부대 밖 한적한 길에서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명령을 했다. 오 대령은 "여자처럼 예쁘게 생겼다"며 이 상병에게 입맞춤을 강요했다. 오 대령은 "명령이다. 어라? 명령이라는 소리 못 들었어?"라고 말하며 완력을 앞세워 이 상병에게 입맞춤을 하는가 하면 이 상병의 성기를 만지기까지 했다. 다음 날 오 대령은 "어제 일이 너무 좋았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이 상병을 다독였다.

여기까지는 '해병대 운전병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이 상병의 주장이다. 이 상병은 오 대령이 이날 총 네 차례에 걸쳐 성행위를 강요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피해 사실을 알렸다. 오 대령은 2010년 12월 30일 해병대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은 원심보다 무거운 징역 1년 9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면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최근 상관의 부당한 성관계 요구에 못 이겨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군 대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군대 내 성범죄 문제가 관심을 받고 있다. 군 문화의 특성인 '상명하복'은 '성(性)' 문화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특전사령관이 여부사관을 성추행해 보직 해임됐고, 육군사관학교에선 선임이 여생도를 성폭행하는 등 군대내 성범죄는 대부분 상급자에 의한 '계급 폭행'으로 나타난다.

성군기 문란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여군만큼이나 남군도 고통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군인권센터가 '2012년 연례보고서'에서 소개한 상담 사례에 따르면 지난해 1월 19일 굴삭기병으로 복무하던 A씨는 파견 지역에서 같은 사단에 복무하는 B씨로부터 성폭행 및 구타가혹행위를 수차례 당했다. B씨는 A씨에게 구강성교를 강요하거나 소변기를 핥으라고 위압을 가했다. A씨는 소속 부대의 중대장, 정비관 등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실질적인 구제를 받지 못했다.

국방부가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0~2011년 군 성범죄 피해자 487명 가운데 135명(27.7%)은 남성이었다. 군인 성범죄 피해자 4명 중 1명이 남성인 셈이다. 동성 간 성범죄 피해자의 상당수가 수치심 때문에 신고를 꺼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해 군인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군대 내 동성 간 성범죄에 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되면서 지난 6월 군 당국은 남군 간 성폭행에도 '강간죄'를 적용하기로 했다. 개정 군형법 제92조는 강간죄 대상을 '여성'에서 '남성'을 포함하는 '사람'으로 확대했다. 친고죄 폐지를 적용하므로 피해자 고소와 합의 여하를 불문하고 처벌이 가능하다. 구강ㆍ항문 성교 등 유사강간에 대한 처벌 규정도 신설됐다.

하지만 관련 법 강화만으로 군내 성범죄를 뿌리뽑기는 어려워 보인다. 당장 폐쇄된 조직인 군에서 피해자가 나서 피해사실을 밝히는 게 쉽지 않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군대 내에서 성범죄 피해를 공론화하는 건 '발가벗겨져서 방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면서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왜곡돼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당했다'고 고백하는 게 쉽지 않다. 자신의 남성성을 오해받는다고 생각하거나 수치심 때문에 고발을 꺼린다. 또한 피해자는 자신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2차 공격도 두려워한다"고 설명했다.

군 검찰의 미온적인 태도도 지적을 받고 있다.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3년 6월까지 현역군인이 성범죄로 군 검찰에 입건된 건수는 1,442건인데 군 검찰의 기소율이 매년 떨어지고 있다. 2010년 44.7%에서 2011년 41.3%, 2012년 38.4%로 매년 하락했고, 올 상반기에는 31.5%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강 의원은 "군이 성범죄사범에 대해 '제 식구 감싸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면서 "군 검찰의 솜방망이 처분이 지속되면 국민의 대군 신뢰도가 하락하는 것은 물론 장병의 군 기강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해병대 운전병 성추행 사건'은 성범죄 발생 시 군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사건 발생 직후에 오 대령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이 상병을 협박하고 해병대 지휘부가 사건 무마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혐의사실을 부분 인정한 오 대령은 재판이 진행되면서 "자백에 가까운 진술을 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ㆍ2심에선 오 대령을 유죄로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이 상병의 진술만으로 오 대령의 유죄를 결정하기엔 미흡하다고 판단했고 사건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서기호 정의당 의원은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성추행이 없었다면 발생할 수 없고, 군의 특성상 가해자가 우월적 지위에 있다 보니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지 못할 수 있다"면서 "1ㆍ2심에선 '성추행이 있었다'는 인권위원회 조사 결과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는데 파기환송심에선 객관적 진실과 정의를 찾아가는 재판이 돼야 한다"고 했다.

이 상병은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서 열린 파기환송 재판에서 3년 만에 오 대령과 마주했다. 그는 사건 이후 심한 모욕감에 자살을 시도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까지 했다. 정신적인 피해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1년 5월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가 됐다. 고등군사법원에서 오 대령의 무죄가 확정될 경우 이 상병의 국가유공자 자격 유지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법원의 판결이 주목된다.



김지현기자 hyun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