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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우리 헤어집시다"

수십년동안 순종밖에 모르던 백발의 아내가 어느날 두툼한 공책 한권을 남편에게 건넨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 싸고 아침 차려주고 재떨이 가져오라면 재떨이 가져오고 직장 동료들과 들이닥쳐 술상 차리라고 하면 술상차려오는 일을 아내의 당연한 의무로만 생각했던 남편은 공책을 펼쳐보고 할 말을 잃는다. 수십년동안 자신의 죄상이 낱낱이 기록된 공책은 깨알같은 글씨로 수백쪽. 아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편에게 이번에는 낯선 신청서를 한장 내민다. 얼마전 받은 퇴직금을 포함해 재산을 반으로 나누는 조건에 협의이혼 하자는 것이 아내의 요구. 이른바 '실버이혼' 또는 '황혼이혼'이다.

일본 등지에서 확대되고 있는 실버이혼이 우리나라서도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혼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어 96년 현재 인구 1,000명당 1.8쌍이 이혼했다. 이는 96년 신고된 혼인 건수의 19.6%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더구나 실버이혼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총 이혼건수 중 10년 이상 살았던 부부의 이혼비율이 44.2%로, 85년에 비해 16.4%포인트나 증가했다. 특히 20년 이상 살다 자녀가 성장한 뒤 이혼하는 경우도 9.6%에 달해 85년(4.7%)보다 2배이상 증가했다. 이혼 10건중 1건은 실버이혼이란 얘기이다. 물론 97년 한해동안 재판을 통해 이혼한 60세 이상 노부부는 불과 7쌍이지만 98년에는 조사된 7,8월 두달동안에만 모두 11쌍의 노부부가 갈라섰다.

최근 반백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헤어지겠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선 승소했으나 2심에서 패소한 할머니의 사연은 실버이혼의 실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A(76·여)씨가 B(84)씨와 결혼한 것은 46년. B씨는 이미 33년 처음 결혼했으나 44년 협의이혼한 뒤 같은해 두번째 결혼을 했다. 그러나 두번째 아내마저 46년 사망하자 같은해 A씨에게 세번째 장가를 가게 됐다.

당시 A씨는 어려운 가정의 무남독녀로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중인 엘리트 신조류 여성이었으며 B씨는 운수업을 하고 있는 재력가였다.

B씨의 가부장적 권위는 신혼부터 시작됐다. B씨는 A씨에게 살림에 충실할 것을 요구했고 A씨는 결국 교사직을 그만둬야 했다. 교사의 꿈을 어렵게 이룬 A씨였지만 남편의 한마디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A씨는 B씨가 '무조건적 복종'만을 요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폭언과 폭행은 물론이고 후처라는 이유로 생활비도 거의 주지 않았다. A씨는 최근까지 월 2만5,000원 정도의 생활비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A씨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것은 B씨가 1남3녀의 자녀에 대해 자신의 친생자가 아니라며 의심하고 심지어 자신이 전처 소생의 아들과 부정행위를 했다며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혼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97년5월 B씨가 국립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B씨는 망상장애 진단을 받고 입원했지만 몰래 집으로 도망쳤다. 그후 집안에서 알몸으로 뛰어다니기 일쑤였고 A씨에 대한 구박도 점점 심해졌다. 돈을 가져갔다고 의심했고 심지어 절도죄로 고소까지 했다.

이에앞서 97년3월 B씨는 서울 장충동의 건물을 시가 4억8,000만원에 매각했다. A씨는 이중 1억6,000만원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B씨는 5,300만원만을 줬다. 나아가 B씨는 97년12월 서울가정법원에 이혼소송을 냈다. A씨는 결국 반소를 냈고 B씨가 소송을 취하하자 지난해 8월 A씨의 소송도 함께 각하됐다. 그러나 50여년동안 복종만을 강요당한 뒤 오히려 이혼소송까지 당하게 되자 억울함과 분통함을 참지못해 이번에는 A씨가 이혼소송을 내게 된 것.

지난해 1심 재판부는 "남편 B씨의 상습적 폭언과 지나친 의심 등의 망상증세로 인해 결혼생활이 더이상 유지될 수 없는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며 원고승소 판결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했다.

서울고법 민사10부(재판장 박인호·朴仁鎬부장판사)는 4일 "B씨가 A씨의 직장까지 그만두게 하고 생활비도 주지 않으면서 근거없이 의심해온 사실 등은 인정된다"며 "그러나 50여년의 혼인생활과 혼인할 당시의 가치기준 및 남녀관계를 고려할 때 B씨의 행동이 심히 부당한 것이라고 보여지진 않는다"고 밝혔다. 시대가 변해 결혼에 대한 가치와 이혼에 대한 관념도 바뀌었지만 A씨와 B씨가 결혼한 당시 즉 40년대의 가치기준과 사회관념으로 보면 B씨의 행동이 이혼당할 만큼 부당한 행위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이어 "B씨가 스스로도 절약하는 생활로 18억원의 재산을 모았고

현재 정신적인 장애를 앓고 있는 만큼 A씨는 남편 B씨를 돌보고 부양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오랜 세월 함께 살아왔고 이미 B씨가 병석에 누운 상태인 만큼 싸우지 말고 해로(偕老)하라는 취지이다.

그러나 A씨와 B씨의 소송에는 돈문제가 얽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결혼당시부터 시작된다. B씨는 자신의 결혼경력에도 불구하고 A씨 집안이 자신의 재력을 보고 딸을 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대해 A씨는 B씨가 이미 두번이나 결혼해 전처 소생의 아들까지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결혼하게 됐다고 반박하고 있다. A씨는 더구나 B씨가 쌀과 반찬 이외의 생활비를 거의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반면 B씨는 A씨가 돈을 헤프게 써서 돈을 모으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받아치고 있다. A씨는 또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 이후 하숙을 치며 쌀가게와 만화가게 등을 통해 자신이 생계를 꾸려나간 만큼 B씨 명의의 재산에 대해 자신도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와중에 A씨가 장충동 건물의 매각대금 가운데 일부를 요구하게 되면서 소송까지 치닫게 된 것이라는 얘기이다.

한편 A씨는 대법원에 상고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A씨의 이혼소송은 3라운드에 돌입할 전망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더이상 실버이혼 또는 황혼이혼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십년동안 복종과 강요속에 억눌린 삶을 살아왔던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아내가 이제라도 자유롭게 살겠다며 어느날 갑자기 이혼을 요구할 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우리 재판부가 이혼에 대해 유책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재판을 통한 이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이제와서 이혼당할 이유가 없다는 남편들의 항변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박일근·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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