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협의회 결성 강행, 구단선 결사항전 강수

프로야구가 18년의 역사상 가장 뜨겁게 달궈진 스토브 리그를 맞고 있다. 예년과 같이 선수, 구단간의 연봉 협상의 차원이 아니다. 올시즌 프로야구가 열리느냐 마느냐, 더나아가 국내 프로야구가 사라질 것이냐 아니냐를 좌우할 만큼 심각하게 과열돼 있다. 현재 대로라면 선수와 구단 양측 모두 서로 중화상만 입히고 말 공산이 크다. 타협과 양보, 대화와 협상의 의지가 양측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6개구단 75명, 압력불구 공식출범

삼성과 현대를 제외한 프로야구 6개구단 선수 75명은 갖은 외부 압력에도 불구하고 22일 새벽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KPBPA·이상 선수협의회) 창립총회를 강행, 공식 출범을 선언했다. 이런 선언이 있은 후 7시간뒤 프로야구 7개 구단주들로 구성된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선수협의회에 가입한 선수 전원을 방출키로 결정, 맞불을 놓았다.

각 구단은 KPBPA에 가입한 선수들을 야구 규약 40조에 의거, 전원 무조건적인 자유계약선수(FA)로 풀고 나머지 선수들로 올시즌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선수협의회 소속 선수들과는 계약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을 사실상 프로야구계에서 축출해버리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구성과 관련해 선수들과 구단이 갈등을 빚은 경우는 이번이 세번째이다. 1988년 최동원(당시 롯데)이 중심이 돼 선수 노조의 형식을 띤 선수협의체가 잠시 결성됐으나 채 1개월을 가지 못하고 해체됐다. 1996년에도 이상훈(당시 LG)이 나서 재추진 했으나 역시 구단과 KBO측의 강력한 제지에 막혀 제대로 출범도 못한 채 무산된 바 있다.

이번 선수협의회는 지난 두번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예전에는 몇몇 주도자들에 의해 이뤄진 반면 이번에는 각구단의 중견을 중심으로 폭넓게 지지 세력이 퍼져 있다는 점이다. 결정적인 기폭제는 지난 시즌 처음 실시된 ‘허울’뿐인 자유계약제도(FA)의 허상을 몸소 체험하면서 부터.

KBO는 지난시즌부터 10년 이상 활동한 선수들에 대해 자유계약 선수를 선언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실제 자유계약을 선언한 선수가 타구단으로 이적할 경우 기존 구단에 300%에 달하는 보상금을 지급토록 규정함으로써 톱클래스 선수들을 제외하곤 이적이 힘들도록 만들어 놓았다.


“물러설곳 없다” “프로야구 안해”

이런 불합리성을 뼈저리게 느낀 선수들이 이제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며 자신의 권익 보호를 위해 선수협을 구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22일 산고 끝에 선수협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자리를 지킨 200여명의 팬들의 절대적인 호응과 네티즌들의 지지 표명, 여기에 NGO인 경실련의 지지 성명 발표 등은 더없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선수들의 주변이 예전과 다른 만큼 각 구단의 결의 또한 어느때 보다 강경하다. KBO 박용오총재는 20일 이사회에서 “선수협이 강행될 경우 프로야구를 안하겠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도 아니며 모’식의 결사 항전의 의지를 비쳤다.

이같은 폭탄 선언에 대해 프로야구 팬들과 여론이 빗발치자 KBO는 22일 열린 이사회에서 “선수협의회 가입 선수가 많을 경우 프로야구를 폐쇄키로 의견을 모았으나 예상했던 390명보다 가입자 수가 휠씬 적은 75명에 불과해 올해 페넌트레이스를 예정대로 진행한다”며 한단계 수위를 낮추었다.

박총재와 KBO 이사회의 이같은 강도 높은 발언은 각 구단이 그간 선수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한 구단 관계자는 “국내 8개 구단은 연간 50억에서 130억원에 달하는 적자를 보고 있다.

더구나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보장하고 FA제 실시 등 선수권익 보호에도 노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수협 설립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적자를 보고 있는 마당에 선수들이 자기 몫만 챙기려 한다면 더이상 프로야구를 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노조를 허용치 않는다. 노조 형식의 선수협의회가 구성된다면 다른 계열사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야구단을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다”고 구단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단 강경대응에 비난 쏟아져

지난 2~3년전부터 프로야구의 인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 각 구단들이 선수협의회 구성에 ‘판을 깨겠다’고 나오는 것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만 치우쳤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것은 마치 구단이 그간 이들 선수들만을 위해 선심성으로 야구단을 운영한 것 같은 인상을 풍겨 뒷맛이 개운치 않다.

현재 프로야구를 운영하는 7개 구단은 대부분 국내에서는 상위 몇 손가락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대의 명분을 들며 프로야구단을 자사 이미지 관리에 활용해 왔다. 실제로 구단들이 외형상 수십억원의 적자를 보고 있다고 하지만 구단을 운영하면서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무형의 이익을 누려온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예로 해태그룹이 부도가 났는데도 야구단인 타이거스 구단은 끝가지 포기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야구단은 숫자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어드벤티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권리다. 물론 구단입장에서는 IMF 한파와 프로야구 인기 하락이라는 이중고에서 이제 막 탈출하려는 시점에서 이런 선수들의 단체 행동이 달가울 리는 없다. 하지만 지난 18년간 구단측이 적자라는 이유로 각가지 규약을 만들어 선수들의 이적과 연봉 협상에서 전횡을 휘둘러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간 선수들을 옥죄온 결과가 이번 선수협의회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구단들은 1군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무려 7,000만원에 이르는 상황인데도 선수들이 더 많은 것을 얻어 낼려고 선수협의회를 만들었다고 비난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구단측은 선수협의회 결성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막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화 채널로 인정하는 것도 대화합의 한 방편이 될 것이다.


같이 사는 냉정함과 지혜 필요

선수협의회측도 자신들의 순수성을 말로만 강변하지 말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선수협의회는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간 선수들을 도와준 기획단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고 있다.

기획단은 지난해말 모정당 전 정책 전문기원과 변호사 대학교수 회계전문가 마케팅 관계자 등으로 구성돼 선수협 결성에 필요한 법적 절차와 진행 방법에 대한 조언을 해 왔다. 이들은 ‘약자인 선수들을 돕는다’는 순수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으나 지나치게 자신의 존재를 감춰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몇몇 야구 관계자들은 이들 기획단이 선수협의회 출범후 엠블렘, 로고 라이선싱 등 자사 수익 사업 구상을 이미 마친 상태라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선수들의 의도가 이런 외부 영리 업자들의 손에 놀아나게 된다면 이것은 선수협의회가 추구하는 순수성을 인정받기 힘들다. 지금이라도 기획단의 실체를 당당히 공개할 필요가 있다.

선수협의회의 성패는 선수들 자신에 달려 있다. 그 힘은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팬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는 곧 기량 향상에 기반을 둔 좋은 경기운영이다. 선수들이 팬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이번 행동도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 공산이 크다.

송영웅·주간한국부 기자


송영웅·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