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공천파문, 민국당 출범·YS 부활로 이어지며 '뒤죽박죽'

산행길에 나선 김영삼 전대통령의 발걸음에 신이 났다. 자신의 ‘주가’가 2년만에 힘찬 반등을 시작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으면서부터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이를 갈며 산을 오르던 시절이나, 2년전 청와대를 떠난 직후의 침울한 산행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YS를 찾은 봄바람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띄웠다. 이 총재가 날린 ‘2·18 공천 칼바람’이 YS에게는 희소식으로 다가왔다. IMF를 초래한 최악의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 파워맨으로 비치는 것은 왜일까.


줄 잇는 상도동 방문객

YS의 주가 상승은 한나라당의 파열음에 이은 ‘민주국민당(민국당)’의 출범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민국당 주도 인사들과 이 총재가 줄줄이 YS를 ‘알현’해 뭔가를 구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YS의 부상이 한나라당 분열, 민국당의 생명력, 4·13총선 구도와 모종의 함수관계가 있다는 얘기다.

2월25일 아침. 이 총재는 출근길에 상도동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다. 예정에 없던 터라 휴대폰으로 방문 의사를 ‘통보 반, 애원 반’한 뒤 쳐들어가다시피 했다. 신당행 또는 반 이회창 계열의 인사들이 줄줄이 YS 상도동 집의 대문을 두드린 후였다.

신상우 국회부의장과 한나라당 공천을 반납한 김광일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22일 상도동을 방문했다. 23일에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이수성 전 총리, 박찬종 전 의원, 서청원·박관용·박종웅·한이헌 의원, 김용태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찾았다. 24일에는 김윤환 의원이 탈당회견을 한 뒤 상도동에 들러 인사를 했다.

YS에게 구애한 인사들의 속셈은 제각각이었으리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YS의 정치적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막강하거나, 적어도 정치권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신한국당과 신당이 YS의 후광을 빌어야 할 만큼 내부갈등이 있거나 부실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선 신당을 보자. 조순 전 한나라당 명예총재와 김윤환 의원, 이기택 전 의원, 신상우 국회부의장, 장기표 새시대개혁당 대표 등 5인은 25일 민국당 창당을 선언했다. 이들은 조 전 명예총재를 대표최고위원에 추대하고 이수성 전 총리를 상임고문에, 나머지 창당주도 5인과 정호용 전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하는 지도체제를 확정했다.


활동공간 넓어진 YS

신당 핵심 구성원 중에서 장 대표를 제외한 4인은 한나라당 공천에서 낙천했거나 이 총재의 공천에 불만을 품고 뛰쳐나온 사람이다. 이들이 말하는 창당의 변은 “1인 보스정치 체제의 폐단을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정치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천탈락을 보스정치 청산 및 민주정치의 밀알과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 공천에서 팽(烹)당한 인사들이 홧김에 창당한다는 인식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창당의 정당성이 위협받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이 말하는 ‘전국정당’의 명분은 찾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YS의 활동공간이 생겨났다. 뒤집어 말해 신당파에게 YS의 이용가치가 생겨난 것이다. 신당파의 계산은 지역당 건설을 위한 교두보 확보에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부산·경남지역은 YS의 영향력을 이용해 챙기고 대구·경북지역은 김윤환 의원을 필두로 한 TK세력이 아우른다는 것. 이 총재가 황급히 상도동을 찾은 것은 이 때문이다.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방화벽’을 쌓아야 한다는 절박감의 소산이었다.

줄잇는 손님을 맞으면서 YS의 노회함이 빛을 발했다. 누구에게도 명시적인 지원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것이다. 신당파를 지원할 경우 자칫 야권분열과 이에 따른 총선패배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두사람 사이로 보아 쉽진 않지만 이 총재를 지지하면 뜻밖에 찾아온 정치적 영향력 회복의 기회를 잃게 될 공산도 있다. YS는 그래서 일단 밋밋한 수사를 동원한 관망자세로 방향을 정한 것 같다.


민국당 파괴력 아직은 미지수

그러면 민국당의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까. 정국 구도상 민국당의 출범과 자민련의 공조파괴 선언으로 ‘1여3야’의 새 형태를 맞았다. 여기에 가장 불안감을 느끼는 쪽은 당연히 한나라당이다. 당초 이 총재가 염두에 두었던 ‘영남 교두보’의 구상이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김광일 전 실장과 강경식, 문정수, 최광, 김도언, 김정수, 오규석씨 등 민주계 인사들이 탈당했거나 집단탈당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박관용, 강삼재, 박종웅, 김무성 의원 등은 PK정서가 민국당으로 기울어질 경우 탈당할 가능성이 높다. TK지역에서도 김윤환 의원 계열 인사들이 빠져나갈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민국당이 장차 총선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해 3야의 한 축을 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민국당이 초반에 세를 확충하지 못할 경우 머뭇거리고 있는 인사들을 추가 영입하는데 차질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민국당으로 말을 바꿔 탄 인사들이 총선에서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지도 의문이다. 정치권 물갈이에 대한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5공 인사들을 포함한 구여권 세력이 어필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창당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로 했던 김용환 한국신당 대표가 불참한 것도 민국당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김 대표는 민국당에 흡수되는 모양세를 원치 않고 있다.


총선 전후 정국의 최대변수

민주당도 ‘1여3야’구도에 따른 손익계산에 바쁘다. 민주당 정세분석위 고위 관계자의 이야기. “신당 창당은 수도권에서 기존 정당에 모두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특히 수도권 야당표는 견고한 반면, 민주당 지지표는 거품이 있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결이 더욱 치열해 질 것이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영남권에서 민국당 변수가 생겼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지만 대신 한나라당이 수도권에 더욱 힘을 쏟으면 싸움이 복잡해진다는 분석이다.

물론 서석재 의원의 탈당·불출마 선언에 이어 김운환 의원이 탈당할 가능성이 있어 민주당도 영남권에서 전혀 손해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민련이 24일 민주당과 공조파기 선언을 들고 나온 배경도 일정부분 신당과 연결돼 있다고 봐야 한다. 야당으로서의 선명성을 부각시키지 않으면 지역구도로 가고 있는 4·13총선에서 제 몫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장이 대전·충청권으로 ‘침입’해 들어오겠다는 의사를 노골화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민국당 출범과 YS의 ‘부활’은 총선과 총선후 정국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영남권, 호남권, 충청권이란 지역주의가 다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DJ-민주당, JP-자민련’에 이어 YS가 PK지역을 무기로 민국당의 막후 실력자로 둔갑하는 형국이다. ‘후3김 시대’가 도래하는 셈이다. YS를 둘러싼 각 세력의 ‘구애작전’이 한국 정치를 후퇴시킬 씨앗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