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만 사건의 주역, 일본의 지하경제의 대부로 통해

한 재일동포가 일본 열도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1991년 이토만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일본 언론은 허영중(許永中·53)씨를 ‘오사카(大阪)의 해결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일본 지하경제의 대부’로 불리고 있다.

그의 이름이 처음 일본을 흔든 것은 1991년 8월 이토만 사건이 터지면서였다. 거품 경제를 배경으로 오사카(大阪)의 중견상사 이토만에서 약 3,000억엔의 자금이 그림과 주식·부동산에 흘러 들어가 사라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그는 시장과 지하를 넘나든 자금의 흐름을 한손에 쥔 인물로 부각됐다.

이어 보석중이던 1997년 그가 서울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가 지난해 11월 도쿄(東京)에서 붙잡히면서 다시 일본을 놀라게 했다. 2년여의 도피 생활중에도 풍족하고 여유롭게 지낸 것으로 당국의 조사결과 드러나면서 도피 배경과 일본 재입국 과정 등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되고 있다. 변호사 3명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도피 방조와 새로 드러난 거액 사기사건으로 잇따라 구속된 데다 최근에는 양국 정계 요인들의 관련설까지 무성하다.


한일 정계인물과의 관련설

검찰 조사 과정에서 그는 “나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이자 한국에서는 요인”이라면서 “이토만 사건으로 붙잡히지만 않았어도 20년후에는 아카사카(赤坂)의 영빈관에서 대접을 받는 인물이 됐을 것”이라고 한국 정계와의 ‘끈’을 내비쳤다. 또 자민당 주요 인사들과의 관계도 거론되고 있다.

성장: 그는 1947년 2월 오사카 우메다(梅田)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야마(湖山)’로 창씨개명, 어린 시절에는 ‘고야마 에이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사카 공대를 중퇴한 후 빠찡코점 지배인 등을 거쳐 26세때부터 건설업에 손을 댔다.

그의 성도 부인의 성을 따라 ‘후지타(藤田)’로, 그후에는 인생의 아버지로 섬긴 노무라 히로시(野村周史)의 ‘노무라’로 바뀌었다. 노무라 히로시는 당시 오사카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20대때 이미 오사카 뿐만 아니라 일본 중앙 정계의 거물들에게 줄을 대고 있었다. 도쿄 아카사카에 있던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총리의 사무실을 방문, 부산과 규슈(九州)를 잇는 고속 여객선 사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니혼레이스 주식 사건, 거물로 부상

그의 정계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실례가 있다. 1994년 세상을 떠난 무대장치회사 ‘신페이(森平)무대기구’의 나가타 히사요(長田久代) 부사장은 가네마루 신(金丸信) 전 자민당 부총재의 여성 후견인으로 유명했다.

나가타 부사장이 주식 매수 경쟁에 휩쓸려 수십억엔의 빚을 졌던 1986년께였다. 나중에 허씨의 하수인으로 밝혀진 한 남자가 나타나 “야쿠자(폭력단)가 노리고 있으니 몸을 숨기는 게 좋다”며 나가타 부사장을 도쿄의 한 호텔로 피신시켰다. 숨은 의도가 파악돼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허영중 방식’의 대표적인 예다.

한편으로는 승부사의 기질도 타고 났다. 그는 1984년 ‘니혼(日本)레이스 주식 사건’으로 일약 일본 지하경제계의 거물로 부상했다. 교토(京都)에 본사를 둔 이 회사는 주식 매수꾼들에게 회사를 빼앗길 위기를 맞았다.

표적으로 삼은 회사의 주식을 집중 매입, 경영권을 빼앗거나 경영진과 협상해 거액의 차익을 챙기는 일본의 주식 매수꾼은 지금도 중견·중소기업을 괴롭히는 각다귀같은 존재이다. 경영진의 상담을 받은 도호(東邦)생명의 오타 세이조(太田淸藏) 사장은 “기시 사카에(岸昌) 오사카 지사와 친한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며 허씨를 소개했다.


정·재계 넘나들며 수완 발휘

교토영업소 총지배인 자격으로 니혼레이스에 입사한 그는 어음을 남발, 회사를 빚더미에 올려 주가를 폭락시키는 기상천외의 수법을 동원했다. 흥미를 잃은 주식 매수꾼들은 주식을 싼 값에 넘기고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수완으로 그는 거품 경제기에는 핵심기업인 ‘간사이(關西) 커뮤니티’와 오사카 국제페리㈜ 등 30여개 기업을 거느린 재벌기업가로서, 또 정·재계를 이어주는 ‘픽서(Fixer)’로서 지하 경제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또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등 폭력단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정·재계 거물들과의 관계를 앞으로 내세우면서 “사람들은 나를 살인 청부업자라고 부른다”는 등 위협도 곁들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후 최대의 경제사건

1991년 8월 허씨와 이토만 상사의 가와무라 요시히코(河村良彦)전사장·이토 슈에이미쓰(伊藤壽永光) 전전무 등이 특수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일본 전후 최대의 경제사건인 이토만 사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토만 상사는 1993년 스미토모(住友)금속계열의 상사로 넘어가 11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또 가조엔(雅敍園)관광, KBS 교토(京都), 간사이(關西)신문, 오사카부민(府民)신용조합 등 수많은 기업이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지거나 도산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재판에서도 유출 자금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아 3,000억엔 거의가 증발한 상태다.

지난해 9월 허씨의 실종속에 열린 1심 판결에서 오사카 지법은 가와무라 전사장과 이토 전전무에 대한 공소 사실을 그대로 인정, 각각 7년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명화(名畵) 거래 사건’은 이토만 사건의 실체를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한 단면에 불과하다.

거품 경제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1989년 10월 당시 이토만 상사의 가와무라 사장은 아이치(愛知)금융 모리시타 야스미치(森下安道)회장으로부터 “우리는 그림 거래로 30억엔을 벌었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했다. 다음달 그는 미술품 거래회사 위촉사원이던 스미토모은행 이소다 이치로(磯田一郞)회장의 장녀로부터 로트렉의 그림을 16억엔에 샀다. 이 그림을 68억엔에 사고 싶다는 허씨의 제의를 들고 간 것이 이토였다.

당시 부동산회사 사장이던 이토는 오사카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땅값꾼’이었다. ‘땅값꾼’은 땅 소유주를 괴롭히는 방법으로 헐값에 부동산을 사 들이고 다시 이를 사기·협박을 섞어 비싼값에 넘기는 전문가들로 대개는 폭력단과 손을 잡고 있었다.


엉터리 감정서로 미술품 거래

엄청난 차익에 놀란 가와무라 사장은 미술품 거래사업 참여를 결심하고 이토를 담당 부문의 책임자로 영입했다. 허씨와 이토가 마련한 함정이었다. 그후 반년간 허씨는 자신의 그룹기업이 소장하고 있던 211점의 미술품을 정상 평가액의 3배인 528억엔에 팔았다. 이토만 상사는 여기서만 343억엔을 잃었다. 감정가를 부풀리기 위해 허씨는 하수인인 세이부(西武)백화점 사원에게 엉터리 감정서를 만들도록 했다.

일부가 드러난 부동산·골프장·주식 투자도 이런 식이었다. 1990년 4월 개발을 포기한 기후(岐阜)현의 골프장 융자 명목으로 이토만 상사를 거쳐 나간 234억엔은 이토의 부동산회사 융자금 변제에 사용됐다. 같은 시기 허씨도 가고시마(鹿兒島)현의 골프장 융자 명목으로 200억엔을 이토만 상사에서 빼냈다.

가와무라 사장이 이런 내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빠져 나간 자금 가운데 일부는 이익 형태로 이토만 상사로 되돌아 왔다. 당시 주거래 은행이던 스미토모은행으로부터 경영권 포기 압력을 받고 있던 그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영 실적을 부풀려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재판중인 지난해 4월 오사카 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정도로 엉뚱한 일면도 있다.


보석으로 석방, 한국으로 건너가 잠적

허씨는 1993년 12월 6억엔의 보석금을 약속하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재판은 계속됐지만 워낙 입을 굳게 다물어 좀체로 진척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그는 1997년 9월 ‘처가의 재(齎)’를 이유로 법원의 허가를 받고 한국에 건너갔다. 그리고 9월30일 협심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직후 홀연히 사라졌다.

그의 잠적은 계획적인 도주로 여겨졌다. 검찰은 한국 당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 추적에 나섰으나 ‘한국에 잠복하고 있다’, ‘북한으로 넘어갔다’, ‘프랑스에 있다’는 등 소문만 무성할 뿐 행방이 묘연해 사실상 추적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도쿄의 한 호텔에 묵고 있다는 제보가 지난해 11월 도교 경시청에 날아 들었다. 호텔에 잠복한 경찰이 외출했다 돌아오는 허씨에게 다가가 신분을 확인하자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180㎝, 100㎏의 거구였던 그는 이미 몸도 반으로 줄어 있었고 머리는 하얗게 세어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지난해 4~5월 도쿄와 오사카 등의 호텔을 전전했으며 6월 이후에는 요코하마(橫浜)의 맨션아파트를 임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모두 타인의 명의였다. 그의 도피를 도운 관련자들도 잇달아 구속됐다.

10년전 긴자(銀座)의 클럽에서 만난 이래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온 재일동포 김미사코(金美佐子·38)씨는 허씨와 함께 호텔에서 붙잡혔다.

이어 도쿄 컨설팅회사의 니시가키 세이하치로(西垣征八郞), 홋카이도(北海道)의 부동산 회사인 ‘글로벌 시스템’의 하야시다 게이이치(林田圭市), 오사카(大阪)의 금융업체 ‘다쿠쇼(拓祥)’의 후쿠카와 다쿠이치(福川拓一) 사장 등이 줄줄이 구속됐다. 자신과 친지의 신용카드를 빌려 주어 허씨의 도피를 도운 혐의였다. 삿포로(札幌)의 오와다 요시마스(大和田義益)변호사가 같은 혐의로 구속됐다.

6명의 이토만 사건 변호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던 오사카의 가네마쓰 고이치(兼松浩一) 변호사는 후쿠카와 사장 등에게 “신용카드를 허씨에게 직접 건네지 않고 허씨의 아들에게 전했다고 말하라”고 조언한 이유로 구속됐다.

특히 허씨의 재구속 이후 새로 입건된 이시바시(石橋)산업 사기 사건과 관련, 도쿄지검 특부수 검사 시절 ‘장인기(匠人技) 수사’를 자랑했던 다나카 모리카즈(田中森一)변호사까지 도쿄지검에 구속됐다. 그의 구속으로 일본 사회 곳곳에 파고 든 허씨의 영향력이 새삼스럽게 확인됐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이전의 행적은 거의 오리무중이다. 조사 결과 허씨가 실종 직후인 1997년 10월 후쿠오카(福岡)공항을 통해 일본에 돌아왔다는 입국 기록이 발견됐다. 그러나 입국 카드의 서명이 그의 필적과 일치하지 않았고 지문도 나오지 않았다.

또 같은 비행기 탑승자 가운데 허씨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주 동기도 불투명하다. 그의 실종 직후 200억엔의 어음사기 사건인 이시바시 산업 사건이 터졌지만 그 정도로 달아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모종의 신변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거론되지만 본인은 나중을 기약하고 있어 궁금증만 더욱 커지고 있다.


정계 커넥션 소문, 의혹 커져

정계 커넥션: 3월 들어 도쿄 경시청은 다른 지역 경찰의 도움을 받아 50명의 전담수사반을 편성했다. 오사카 지검이 담당검사를 8명에서 16명으로 늘린데 이어 도쿄지검 특수부도 담당 검사를 8명에서 20명으로 늘렸다. 이런 대대적인 수사망은 궁극적으로 일본 정계를 겨냥하고 있다는 관측이 파다하다.

검·경은 허씨가 묵었던 도쿄의 호텔방에서 50건의 상거래 관련 서류를 발견했고 김미사코씨의 자택에서도 중요한 단서를 확보했다. 이시바시 사기사건 수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증거 덕분이었다. 허씨의 도주를 정계 실력자들이 도왔다는 소문과 관련한 서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후쿠오카 소재 화장품회사의 1억8,000만엔짜리 약속어음 사본이 대표적인 예이다. 허씨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이 회사는 지난해 6월 개봉한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영화 ‘그 여름날’의 후원사로 3억엔의 후원금을 내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개봉전까지 오바야시 감독에 지불된 돈은 1억2,000만엔에 그쳤다. 나머지 1억8,000만엔은 허씨의 도주를 도운 변호사와 부동산업자를 거쳐 김미사코가 임원으로 있는 ‘KMK’에 조각품 4점의 구입 대금으로 지불됐다.

이 영화는 히로시마(廣島)현 오노미치(尾道)시의 시승격 100주년을 기념, 오노미치시를 무대로 했다. 화장품회사의 후원은 자민당내 실력자로 오노미치 출신인 가메이 세이코(龜井靜香) 전운수성장관의 개인 비서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후원은 1억8,000만엔을 허씨에게 건네기 위한 무대장치였다는 일부 보도를 가메이 의원측은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수사 당국이 압수한 문건 가운데는 정치인들의 실명이 적힌 것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일본 국민의 의혹을 부풀리고 있다.

<사진설명> 1991년 8월 오사카에서 구속될 당시의 허영중씨(왼쪽)와 지난해 11월 백발이 다 되어 체포된 모습.(뒷자리 안경쓴 사람)

도쿄=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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