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금융구조조정, 은행권 지각변동 예고

은행권에 또한차례의 대규모 지각변동이 임박했다. 남은 시간은 불과 3~4개월. 이르면 10월, 늦어도 12월이면 은행권의 판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물론 2년전 퇴출과 합병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차 은행구조조정과는 과정도, 결과도 판이하다. 이번 2차 은행구조조정에는 무엇보다 ‘퇴출’이 없다. 모든 은행이 ‘생존’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싱거운 구조조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2차 은행구조조정의 ‘퇴출배제 원칙’이란 어디까지나 당장의 퇴출, 정부에 의한 강제퇴출이 없다는 것일 뿐 결코 영생(永生)을 공인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젠 거짓말도, 로비도, 읍소도 통하지 않은 시장이란 ‘새로운 절대권력’에 의해 모든 은행이 언제라도 퇴출당할 수 있는 냉엄한 현실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은행 새판짜기, 3개군으로 나뉘어져

10월이후 은행권의 판도는 우량은행과 비(非)우량 독자생존은행, 지주회사 편입은행 등 3개군(群)으로 재편된다.

이같은 판짜기는 9월 말이면 어느 정도 그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1차 관문은 9월 중순께 발표될 은행별 상반기 결산현황. 현재의 부실 뿐아니라 미래의 부실(잠재부실)까지 모두 반영한 은행별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확정·공표되면 8%를 기준점으로 1차 운명이 결정된다.

BIS 자기자본비율 8%를 넘는 은행, 즉 우량은행들은 독자생존이 허용된다. 주택 국민 신한 하나 한미은행 등이 이 부류에 속할 전망이다. 이들은 혼자 살든, 타은행과 짝짓기를 하든 아무런 정부간섭을 받지 않는다.

모두 독자생존을 희망하겠지만 이미 전략적 제휴를 선언한 하나·한미은행처럼 ‘시장의 힘’에 어떤 형태로든 합종연횡(合從聯橫)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올해 안에 눈에 띄는 대형합병은 없다”는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의 말처럼 본격적인 합병과 제휴는 내년이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는 곳은 BIS 자기자본비율 8%에 미달하는 은행과 공적자금 투입은행. BIS 8% 미달은행은 9월말 은행 상반기 결산결과가 나와봐야 알수 있겠지만 일부 지방은행이 여기에 속할 것으로 보인다. 공적자금 투입은행은 조흥 한빛 서울 외환은행이다.

이들은 ‘경영정상화 계획심사’라는 2차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BIS 8% 미달은행과 4개 공적자금 투입은행은 9월말까지 부실채권정리와 자본금확충 등 경영정상화를 위한 세부방안과 일정을 담은 계획을 경영평가위원회에 제출해야한다.

경영평가위원회는 대학교수와 회계사 등 8인의 민간전문가로 구성되는 한시기구로서 2차 은행구조조정의 ‘합의재판부’ 역할을 하게 된다.

경평위는 이들 은행이 제출한 경영정상화 계획을 심사, 자력으로 부실을 정리하고 자본금을 확충해 일정기간내 BIS 비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된 은행에 대해선 독자생존을 허용하게 된다. 독자생존을 인정받은 은행은 1차 관문에서 BIS 8%를 초과달성해 자력생존을 인정받은 은행처럼 홀로서기 또는 짝짓기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부실은행, 지주회사 아래 자회사로

문제는 자력으로 부실정리 및 자본확충이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부실은행들.

1998년 1차 구조조정때는 자력회생 능력이 없는 부실은행은 자산부채인수(P&A) 방식으로 우량은행에 흡수(동화→신한, 대동→국민, 동남→주택, 경기→한미, 충청→하나)되거나 부실은행끼리 합병(M&A;상업+한일=한빛, 조흥+강원+충북=조흥)하는 원칙이 적용됐지만 이번 2차 구조조정에는 ‘금융지주회사’ 모델이 처음으로 시도될 예정이다.

우선 정부는 이들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 BIS 비율을 10%선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 순간 부실은행이 ‘클린 뱅크’로 탈바꿈하게 된다.

대신 지금처럼 다수의 공적자금 투입은행이 병렬적으로 산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자금 투입주체인 예금보험공사를 대주주로 하는 지주회사 아래 자회사 형태로 묶이게 된다.

금융지주회사의 설립은 이달초 은행파업사태를 초래했던 직접적 계기중 하나였다. 금융지주회사 도입에 대해 정부는 “금융의 대형화와 업무 다각화를 위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고 주장했던 반면, 금융노조측은 “강제합병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라며 결사반대 입장을 보였다.

결국 ‘하루의 스트라이크’로 끝났지만 사상 초유의 은행파업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정부가 부실은행들을 P&A나 M&A아닌 지주회사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구조조정의 연(軟)착륙’에 있다. 은행간판을 내려야하는 P&A나 M&A 방식을 취할 경우 1998년에 경험했던 것처럼 기존 거래관계의 단절 및 막대한 인원정리 등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그러나 지주회사 자회사로 편입시킬 경우 은행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열관계인 ‘형제은행’들과 전산시설 등에 공통투자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정부는 부실은행을 묶는 금융지주회사에 공적자금이 투입된 보험사와 종금사 등도 함께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이 금융지주회사는 결국 은행과 은행 자회사인 증권 리스 투신 종금 보험 등을 거느리는 ‘매머드급 국영 종합금융그룹’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초대형 금융지주회사로 편입될 은행은 어디인가. 결과는 9월말 경영평가위원회의 판정에 달려있지만 주목할 사실은 은행파업을 둘러싼 노·정간 합의이후 시중에 나돈 ‘이면밀약설’이다.

“특정은행의 거취에 대해선 어떠한 합의도 없었다”는 정부와 노조측의 부인에도 불구, 금융권과 노동계에서는 공적자금 투입은행인 한빛 조흥 외환 서울은행에 대해 각각 이런저런 이유로 “정부가 독자생존을 약속했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9월말이면 이면밀약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겠지만 이 때까지 각 은행은 어떤 형태로든 지주회사의 울타리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뼈를 깎는 자구계획을 만들고 독자생존의 당위성을 요로에 설득하는등 필사적 몸부림을 칠 것이 확실하다.


자금 대이동 부를 예금자 보호법

자력생존은행이 가려지고 지주회사가 만들어지면 정부가 주도하는 2단계 은행구조조정은 종료된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은행들이 넘어야할 최종관문은 내년 1월1일부터 시작되는 ‘예금부분보장제’다. 은행이 파산할 경우 원금과 이자를 합쳐 2,000만원(이 금액은 다소 상향조정될 수 있다) 밖에 돌려받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떤 예금자도 부실하고 위험한 은행에 소중한 자기재산을 맡겨두려하지 않을 것이다.

내년 예금부분보장제를 앞두고 올 하반기부터 부실은행에서 우량은행으로의 자금 대이동이 예상된다.

아무리 정부가 독자생존을 인정했다해도 예금자로부터 버림받는 은행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이다. 관(官)에 의한 구조조정은 끝나도, 시장에 의한 구조조정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이성철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18 19:58


이성철 경제부 sc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