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최고위원 '시집살이'

정책위의장이 실무라인으로 위상 하락

지난달 추석연휴 직후 이재정 김성호 의원 등 민주당 초.재선의원 13명이 `당 지도부 개편'을 요구하고 나왔을 때 이해찬 정책위의장은 기자들과 만나 “나야 쌍수를 들고 환영이지”라며 빙긋 웃었다.

이 의장은 그때 이런 말을 했다. “교육부장관에서 물러나 좀 쉬어볼까 하던 참에 전임 이재정 정책위의장이 설화에 휘말려 급작스레 사표를 내고 당에서는 나더러 그 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꼭 8.30 전당대회까지만 한다는 생각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전당대회 후 대통령을 뵌 자리에서 `그만 해야겠다'고 여쭈었더니 `계속 하라'고 하시더라. 어쩌겠는가. 대통령이 계속하라는데….”

그는 이어 “나라고 최고위원에 욕심이 없었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책위의장 자리만 아니었으면 최고위원에 도전했을 것이란 얘기다.

15대 총선 당시 그의 추천 케이스로 정치에 입문한 정동영 의원이 전당대회에서 정책위의장의 `상전' 격인 최고위원에 당선된 사실을 감안하면 4선 중진인 이 의장의 얘기는 사실 `이유있는 푸념'이다. `피해가 막심하다'는 기자들의 농담에 이 의장은 “피해까지야…”라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아의식 강한 개혁가적 정치인

이 의장은 보기 드물게 자아의식이 강한 정치인이다. 깡마른 인상에 똑 부러지는 말투 등 외양도 그렇지만 지나온 정치행적 자체가 `두루뭉수리'와는 인연이 없다.

군부독재에 맞서 수년간 옥고를 치렀던 재야 전력이 그렇고 국민의 정부 초대 교육부장관을 지내면서 그가 추진했던 급진적 교육정책이 또 그랬다. 그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반체제', 현정부 들어서는 `급진개혁'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다.

자존심 강한 이 의장으로선 이유야 어찌 됐건 후배 의원들로부터 `개편의 대상'중 한명이 되었다는 사실은 참기 힘든 수모였을 것이다. 주변 사람의 전언에 따르면 이 의장은 소장파 의원들의 지도부 사퇴요구가 나온 직후 사퇴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그는 사석에서 “힘들어서 쉬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고 지난달 열린 의원총회에서는 옆 자리에 앉은 동료의원에게 “사퇴할 수 있도록 발언해달라”는 내용의 메모지를 건넸다. 그러나 주변의 만류와 당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자신의 스타일만 고집할 수는 없다는 부담 때문에 끝내 자제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 의장을 정말 피곤하게 만든 것은 `밑으로부터의 압박'보다는 `최고위원회와의 갈등' 때문이란 것이 정설. 전당대회 후 최고위원회의가 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되면서 이전에 `당 지도부'로 일컬어졌던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총무 등 당3역은 실무라인으로 위상이 현격히 떨어진 감이 있다.

과거에는 주요 현안에 대한 정책결정사항의 경우 정책위의장의 견해가 그대로 당의 공식 의견이 되었던 데 반해 이제는 당무회의 의결에 앞서 일일이 최고위원회에 보고를 거쳐야 한다.

문제는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정책위의장과 최고위원 간에 시각차가 노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당 정책위의 입장과 최고위원들의 얘기가 서로 달라 도대체 무엇이 여당의 방침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최고의원들, 주요현안에 제동

대표적인 예가 의약분업 시행을 둘러싼 논란. 지난달 의사들의 폐업으로 의약분업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정점에 달했을 때 이인제 최고위원은 `의약분업 연기론'을, 박상천 최고위원은 `일본식 임의분업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는 “의약분업의 근본 골격에 손 대는 일은 절대 불가”라는 정부와 당 정책위의 기본 입장에 전면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당시 이해찬 의장은 이와 관련, “최고위원들이 도대체 의약분업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며 “문제점을 보완하고 국민을 설득해 의료개혁을 추진하기는커녕 여론에 편승, 혼란만 초래한다”며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심지어 당 지도부에 “의약분업의 원칙이 무너지면 사퇴하겠다”고까지 했고 9월23일에는 “몸이 불편하다”며 사전 예고없이 결근, 무언의 항의시위라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지난달 22일 임채정 신기남 의원 등 `열린 정치포럼' 소속 민주당 의원 9명이 의약분업과 관련한 최고위원들의 무책임한 발언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일각에서는 `이 의장의 친위쿠데타'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 의장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한 데는 최고위원회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있다. 이 의장의 지론은 정책은 어디까지나 정책적 고려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 반면 상당수가 잠재적 대권후보군으로 분류되는 최고위원들의 경우 정책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의약분업은 전개양상에 따라서는 차기 대권가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원칙고수 보다는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 최고위원들의 생각. 이처럼 근본적 인식차를 지닌 최고위원들을 `시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 직선적 성격의 이 의장에게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는 관측이다.


현실과의 타협에 심한 피로감

그러나 최근 민주당의 정책기조에서는 이 의장 스스로 정치적 고려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 적지않게 눈에 띈다.

공정위 계좌추적권 무기연장, 금감위 기업조사권 부여 등 정부측 요청에 대해 이 의장은 “시장에 부담을 주는 정책만 자꾸 요구한다”며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지역의료 보험료의 경우에도 인상요인이 충분함에도 “급작스런 인상은 국민에 부담을 줄 수 있다”며 보류했다.

교육부장관 재직 당시 `교육정년 단축'을 고집하다 거센 반발에 부딪혀 중도하차했던 급진적 이미지에서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다.

개혁보다는 안정에 치중해야 하는 집권후반기라는 시기적 특성, 정책의 정당성 뿐만 아니라 인기까지 고려해야 하는 여당 정책위의장의 한계가 이 의장의 개혁가적 이미지를 크게 희석시킨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해찬 의장이 겪고 있는 피로감은 그의 태생적 급진성과 안주를 강요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원명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11 10:45


노원명 정치부 narzi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