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들여다보기] 법원으로, 법원으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면 워낙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어서 그런 사람은 평생 법의 심판을 받을 일도, 법의 도움을 받을 일도 없을,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문화를 살펴보면 법은 멀고 어려운 곳에 있어왔다. 웬만한 분쟁은 마을 어른이 나서 중재하거나 서로 양보함으로써 해결해왔다.

만일 이러한 공동체적 분쟁해결 방식으로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을 경우에는 할 수 없이 법원에 가게 되는데 일단 법원까지 갈 정도가 되면 당사자들은 이미 다시는 안볼 작정을 한 원수지간이 돼버리고 만다.

그만큼 법원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서는 안될 곳이며 될 수 있으면 법원까지 가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

미국 사람의 법원에 대한 인식은 사뭇 다르다. '소송하는 사회'라고도 일컬어질 만큼 미국에서 법원에 가는 것은 일상화돼 있다. 교통사고가 났을 경우 잘못이 없는 당사자는 바로 법원에 소송을 건다. 대형 할인매장에서 넘어져 다치면 우선 매장을 상대로 소송부터 걸고 본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마신 커피에 입안을 데자 "커피가 너무 뜨겁게 끓여져 나왔다"고 소송을 걸어 수백만 달러를 보상받은 경우도 있다.

아이가 태어나서 만18세가 될 때까지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이가 비정상이다 싶으면 아이를 받아준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분만과정에서의 실수로 아이가 비정상이 되었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미국에서 소송은 다반사처럼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그렇게 많아도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소송을 걸었다 하더라도 법정에서 반드시 끝장을 보지는 않는다.

미 연방법원에 제기된 사건의 90% 이상이 중도취하된다는 통계가 말해주듯 당사자들은 대개 소송도중에 화해하고 분쟁을 종결시킨다. 실제로 법원 심리에 들어가 판결까지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국의 사법절차 중에서 특이한 제도 중 하나인 증거개시 절차를 거치다 보면 당사자들은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심리에 들어가지 전에 서로 합의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에 가는 것을 선호하는 미국인도 자신의 대통령이 법원에서 결정되는 것만은 싫은 모양이다. 우여곡절을 겪고서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거의 3주일 만에 공화당의 부시 후보가 플로리다주의 선거인단 25명을 얻는 것으로 공식발표됐다.

이에 민주당의 고어 후보가 법정투쟁을 불사할 것을 선언하자 여론은 '고어가 이제는 패배를 시인하고 선거를 종결지어야 한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면서 유권자들은 법원이 대통령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미국의 사법부는 스스로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헌법의 해석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판단을 자제해왔다.

이번 선거에서도 플로리다주 선거에 관해 연방법원이 "관할권이 없다"고 공화당의 수검표 중단 신청을 기각한 반면에 그것이 헌법상의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연방대법원이 이를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플로리다주 대법원은 주 국무장관에게 수검표 결과를 공식집계에 포함시키라고 했지만 기표의 유ㆍ무효에 대한 지침을 내려달라는 요청에 대하여는 즉답을 회피했다.그것은 각 카운티의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반쯤 떨어져나간 것을 유효로 할 것인지, 아니면 네 귀퉁이 중에서 세 귀퉁이 이상이 떨어져나가야만 유효하다고 할 것인지 등은 법원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변호사들은 민주당쪽의 성향이 강하다. 민주당의 반기업적 성향이 소송변호사의 이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팜비치 카운티의 주민 대다수가 뉴욕 등 동부도시에서 활동하다가 은퇴한 변호사가 많다는 것을 알면 왜 민주당이 그 지역의 재검표에 매달리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민주당은 끝까지 법정투쟁에 매달리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도 법 없이 살 사람이 칭송받을 날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박해찬 미 HOWREY SIMON ARNOLD & WHITE 변호사

입력시간 2000/12/1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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