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유가족들, "이번엔 진실 밝히겠다."

납득 안되는 수사결과와 진정인의 외침

의문사의 피해자에는 세칭 '녹화사업'의 관련의혹이 있는 군 사병, 시위주도 학생, 독재권력에 저항한 재야인사, 노동운동가 등 다양한 유형이 있다. 유가족들이 타살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배경에는 군사 독재권력의 폭력성과 관련기관의 폐쇄성, 이에 따른 수사의 은폐ㆍ조작ㆍ축소 가능성이 깔려있다.

1984년 4월2일 육군 7사단 소속 허원근(당시 21세) 일병이 내무반에서 50m 떨어진 폐유류고 뒤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은 채였다.

총탄이 발사된 화기는 허 일병의 M16 소총이었다. 군 수사기관은 자살로 판정했다. 이상성격을 가진 중대장의 학대를 비관, 부대 상황실에서 실탄을 훔쳐 자살했다는 것이다.

허 일병의 아버지 허원근 씨는 수사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실탄 3발을 차례로 쏴 자살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허 일병의 총은 방아쇠를 한번 당길 때 한발씩만 발사되는 반자동 상태에 있었다. 더구나 사망현장과 시간을 조작한 의심도 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수사결과

허 일병은 광주 민주화항쟁 당시 고등학교 3학년으로 시위에 참가한 적은 있었지만 국립수산대에 진학한 후 운동권에 참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3학년1학기 입대와 관련한 휴학계가 학교당국에 보관되고 있지 않아 강제징집의 가능성은 있다.

아들을 잃은 허원근 씨는 지금까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고 울먹였다. 정신적 고통은 물론이고 진실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쫓아다니느라 집안도 파탄이 났다.

대통령에 탄원도 했고 국민고충처리위에 진정도 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의 조사결정이 내려지자 허씨는 "이번에야말로 조사에 직접 참여해 진실이 밝혀지도록 하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1989년 8월15일 사망한 이내창(당시 26세) 씨는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다. 사망 당일 그는 거문도 유림해수욕장 인근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다. 수사는 실족에 의한 익사로 종결지워졌다. 학생운동에 대한 압박감으로 거문도에 가 유림해수욕장 근처의 바위를 타고 돌아다니다 미끄러져 익사했다는 것이다.

규명위에 진정서를 낸 형 이내이씨는 사고사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동생이 거문도에 갈 때 안기부(현 국정원) 인천분실 여직원 1명을 포함한 여러 사람이 동행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동생 시신의 머리에 난 중상이 실족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기도 어려웠다.

이내창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쓰러져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내이 씨는 "규명위에 수사권이 없어 진실규명 가능성이 비관적이긴 하지만 기대와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학계 인사로는 1973년 10월18~19일 사망한 최종길(당시 41세) 서울대 법대교수가 대표적이다. 최 교수는 유럽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 남산 분청사에서 조사받던 중 출두 사흘만에 중정 건물내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중정측은 최 교수가 고정간첩으로서 가족과 조직망을 보호하기 위해 7층 조사실 화장실 창문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밝혔다.

1988년 가족의 진정에 따라 사망원인을 재수사한 검찰측은 자살의 증거도, 타살의 증거도, 또 간첩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입증할 증거도 찾지 못했다며 수사를 종결했다. 최 교수의 주변에서는 그가 자살할 동기가 없고 간첩단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며 중정의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보고 있다.


장준하씨 사건 등 타살 흔젹 역력

박정희 정권 시절의 또다른 대표적 의문사로 타살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는 장준하(사망 당시 63세)씨 사건이다.

장준하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 민족지도자로서 박정희 정권에게는 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1975년 8월17일 경기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을 등산하다 14m 벼랑 아래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수사결과는 하산 중 미끄러져 벼랑에서 추락하면서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는 것.

장씨의 부인이 피진정기관으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했고 이 사건은 의혹투성이의 상황이다. 경사 70도의 14m 절벽에서 추락한 시신에 골절이 전혀 없었고 팔과 엉덩이에는 의문의 주사자국이 있었다. 사인도 외부의 가격에 의한 두부 함몰상으로 추정됐다. 더구나 추락지점은 길이 없어 일반인이 등산하기 힘든 곳이었다.

타살 의혹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은 당시 정권과의 관계였다. 장씨는 사망 석달전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몸조심하라"는 당부 전화를 받은 사실이 있었다.

사고 발생 후 출동한 군수사관이 추가 현장조사를 중지한데다 사건 취재기자의 구속과 취재중지 압력이 잇달아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고규명을 위해 활동하던 장씨의 장남이 의문의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의문사 피해자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위의 활동을 불안스러운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박정기(71ㆍ고 박종철군 아버지) 회장은 "강제권이 없는 규명위의 법적 한계로 인해 진실규명이 어려울 것으로 보는 것이 유가족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유가족의 한풀이와 인권신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주도록 규명위에 촉구했다. 유가협은 현재 국민연대와 협력해 의문사에 대한 실질적 조사가 이뤄지도록 정부에 압력을 넣고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06 19:14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