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미술평론가 곽대원(下)

'맨땅에 헤딩'이 특기인 실속파 괴짜

혹시 서울 방배동 어딘가에서 골목을 쓸고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가?

확률은 50대 50. 환경미화원 아니면 1녀1남의 애처가 곽대원이다. 사람욕심 유별난 바로 그 사람이다. 보통 부지런한 남자가 아니다. 수첩엔 인근 경찰서, 동사무소 등 관공서 전화번호를 줄줄이 적어놓고 문제만 있다 하면 꼬박꼬박 전화를 건다.

신고내용을 묵살했다간 누구처럼 조용히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끈질긴 그의 저력에 밀려 모 책임자는 결국 이 동네를 떠났다. 임명장도 없는 지역수비대, 모토부터가 '내 동네는 내가 지킨다'다.

이 남자가 하는 일은 여러가지다. 대표적 타이틀은 미술평론가지만 수원여대 영상산업학부 교수, 전시기획 전문가, 만화평론가, NGO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또 이사로 발목 잡힌 벤처기업만 줄이고 줄인 것이 현재 네 군데다.

부르기론 '곽 교수'가 가장 좋겠지만 그것도 시한부다. 올 봄에 사표를 낼 작정이기 때문이다. 3년이나 학교에 머문 것도 어찌 보면 용하다. 애초부터 월급쟁이 생활을 사양하던 그가 교수직을 맡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진조퇴다. 퇴사의 변은 이렇다.

"재미있었지만 더이상 재미가 없다."


"저승에서도 뭐든 팔고 올 사람"

학생 사이에선 인기있는 괴짜선생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학생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우산을 받친 채 수업을 듣게 했다.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취지다. 틈만 나면 강의실 대신 학생들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특기.

현장학습만한 게 없다고도 한다. 시나리오 창작 수업 땐 각자의 인생스토리를 픽션과 논픽션 두 가지로 써오라는 주문으로 두통을 앓게 했다. 인간의 표정 50가지를 찾아오라는 드로잉 숙제도 있었다. 학생들을 못살게 구는 스승. 그래도 곽 교수의 수업엔 학생들이 북적댔다.

'저승에서도 뭐든 팔아치우고 올 사람'이 그의 별명이었다.

너무 열심히 가르쳐서 일찍 진이 빠졌다. 천성이 무소속과인 그로선 갑갑증이 날 때도 됐다.

나이 마흔셋. 가슴 뛰는 새 사업도 이미 대기중이다. 어떤 일? 투철한 실험정신을 빼면 시체. 진작에 한물 가버린 벤처인큐베이팅 사업을 엉뚱하게도 이 시점에 들고나왔다. 종목 선정의 이유가 정말 장렬하다. "잘될 때 잘되는 사업을 하는 것보다 안될 때 안되는 사업으로 승부해 성공시키는 게 진짜배기 같아서"다.

그러고 보면 그 성미에 딱 맞아떨어지는 업종이다. 이름 그대로 자본이며 인력, 기술, 경영 등등에서 맨땅과 빈손의 신생기업을 스스로 설 때까지 키워준다는 전방위 컨설팅 사업. 인생이든, 사업이든, 머릿 속엔 온갖 아이디어로 와글거린다.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오리무중이다. 해부가 만만치않다.

그가 항상 자신에게 던져보는 물음이 있다. '지금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그만큼 많은 갈랫길을 넘나들며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자유인이 되기를 원했다. 초등학교 시절 겁도 없이 단독밀항을 시도했던 소년.

가족 몰래 비상식량까지 준비해 연안부두까지 찾아갔다가 미수에 그쳤다. 지독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5학년땐 누가 시키지도 않은 노트 몇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방학 과제물로 제출해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 서울시에서 상까지 줬다.

그림도 잘 그렸다. 사생대회에서 항상 1, 2위를 다퉜다. 유난히 친구들이 좋아하던 그의 그림은 어딘가 모르게 만화 냄새가 났다. 사실 책보다 친했던 게 만화였다. 군인인 아버지가 주신 용돈은 물론이고 가끔은 쌀을 살 돈까지 장남인 그의 주도 하에 6남매가 작당해 만화대여비로 탕진했다.

1978년 미술대학에 진학한 뒤엔 한때 아마추어 싱어송라이터였다. 작곡법 한번 정식으로 배운 적 없이 80여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직접 작사, 작곡, 노래한 '나의 작은 천사'는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도 올라 방송을 탄 적이 있다.


상상을 뛰어넘는 수완가

대학원 땐 전공도 바꿨다. 신문방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부가 끝나자마자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86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이란 화랑의 큐레이터로 출발해 민족미술작가 진영과 재야화단 쪽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1993년까지 7년동안 총 300여회의 국내외 공연전시를 기획, 인정도 받았다. 통일부 승인 하에 조총련과 접촉, 남북문화교섭도 끌어냈고 중국과의 수교가 맺어지기도 전에 한중교류전을 성사시키는 등 국내외에서 화제작을 터뜨렸다. 그것은 경제적인 실리로도 이어졌다.

처음 보증금 300만원으로 시작한 화랑을 1년만에 보증금 3,000만원짜리로 격상, 유동자금 6,000만원까지 확보해놓은 살림꾼이었다. '최소한의 내 몫은 다 했다'는 생각에 독립했는데 후임자가 넘겨받은 뒤 화랑이 서서히 퇴락, 결국 1년만에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얼마나 독하게 일했던가를 그때서야 알았다.

인사동 시절에도 내내 술이었다. 유명인사든, 무명의 작가든 대낮부터 저녁까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렸다. 생판 처음 보는 작가라도 아까운 사람이다 싶으면 대가없이 나서서 그림도 팔아주고, 공짜로 전시관도 찾아 연결해줬다.

예나 지금이나 착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턱없이 놀아야 되는 꼴을 못보겠기 때문이다. 아내도 그 틈에 얻었다. 독특한 작품이 묻히는 게 안타까와 대신 언론홍보전까지 펼치며 밀어준 한 판화가가 마침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일어섰을 때, 어느날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여성이라며 누군가를 소개했다. 역시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그렇게 얻었다.

어느새 성격이 달라졌다. 주변의 사람은 그더러 흡인력이 있다고들 했다. 어쩌면 원래부터 그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때 경포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알게 된지 채 몇시간도 안 돼 자기 집안 가족회의에까지 데려가 '심판'을 맡겼다.

1989년 중국과의 교류전을 추진할 때도 행사를 무산시킬 임무를 띠고 찾아온 안기부 직원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그와 친한 사이로 반전됐다. 협조는 커녕 "행사홍보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나를 더 탄압해달라"며 뻣뻣하게 굴던 그였다.

프리랜서로 독립한 뒤 더욱 제 물을 만났다. 미술, 애니메이션, 영상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다.

1993년 서울시 정도 600년 기념행사 '한양에서 서울까지'의 실행감독, 1994년 국립미술관 민족미술 15주년 행사 기획위원, 1995년 광주 비엔날레 큐레이터, 1997년 제1회 국제만화페스티벌 조직사무국장 등 다 받아적기 피곤할만큼 경력사항이 총총하다. 미술, 만화평론 분야에서도 꾸준히 활동, 1995년 국무총리상과 예술평론가상을 받기도 했다.

다녀본 외국만도 수개국, 수십차례다. 그러나 한번도 제돈 주고 다닌 일이 없다. 공짜 밝힘증이 있어서가 아니다.

관련 분야의 외국 단체나 정부, 또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초청을 받거나 그것도 아닐 땐 후원의 대가로 새 사업아이디어를 제공해주는 식의 당당한 공짜행차다. 그게 아니라도 그는 세상 어디에 던져놓든 생존은 물론, 칙사대접까지 받고 살다가 올 인물이다.

증거 몇가지. 언젠가 이태리에서 길을 잃고 오갈 데 없어진 '난민' 처지에서도 이태리어 한마디 아는 것 없이 건너편 아파트의 외국 대학생들과 얘기한 뒤 그들의 집에 초청받은 것은 물론 다음날 관광안내까지 받고 잘지내다 왔다.

삭막한 서울바닥에서도 입증된 내공이다. 무일푼의 심야취객이면서 말 몇마디로 집까지 공짜 택시를 타고 온 희귀족. 술값으로 빈털털이가 된 어느날 택시 승강장의 손님과 잠깐 협상을 벌인 게 비결의 전부다.


할말 다하면서도 미움 안받는 사람

그러나 그도 싫어하는 자리가 있다. 사람 가리기로 치면 그도 엄청 사람을 가리는 사람이다.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관계나 모임은 아무리 화려한 인물이라도 만나지 않는다.

멋모르고 참석한 자리조차 잠시후면 사라지고 없다. 그의 속내는 얼굴에서 먼저 표시가 난다. 대화를 좋아하는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면 십중팔구 곧 자리를 뜰거라는 신호다. 행여 이것을 고위층이 두려워 피하는 약골로 해석한다면 명백히 오산이다.

그를 특이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중 또 한가지 이유는 그 어떤 VIP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하고 보는 당돌성이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미움이나 욕을 먹지 않으니 더 기막히다는 게 포인트다.

"상대가 누구든 항상 그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도 사람이다.'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려고 애쓰지요. 대신 제가 갖춰야 할 예의는 최대한 갖추려고 늘 노력합니다. 그런 자리의 제가 거슬려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그런 것 때문이겠지요."

한때는 1년에 3억원의 수입까지 올린 바 있는 능력있는 프리랜서. 1996년에 번 돈은 1997년에 다 잃었다. 돈이 모일만 하면 꼭 주변에 무슨 일인가가 생겼다. 축재엔 도무지 인연이 없다.

돈이야 다시 뛰어 벌면 그만. 현재 통장 잔고가 얼마든 그가 믿는 진짜 재산은 그런게 아니다. 건강이 좋지않아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절대 술 마시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지막으로 나랑 술을 마시고 가라"는 의사에게 몇번이나 붙잡혔다.

젊은이들이 보낸 이메일 팬레터로 '메일용량이 초과했다'는 전자통지도 받아봤다. 분주한 편지질을 눈치 챈 아버지는 당신의 장남이 원조교제를 하는 것으로 의심해 몰래 며느리에게 밀고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않고 울어대는 핸드폰, 주위에선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구박이다. 이 심각한 세상에 자기 혼자 인생이 신난다고 희희낙락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든든한 네트워크가 버티고 있는 한 행복해하지 않을 도리가 있냐고 그는 자신만만이다.

요즘 그는 서울역 부근 한 빌딩 17층에서 일한다. 하늘과 마천루 꼭대기만이 눈에 걸리는, 새 사무실 겸 아지트다. 이곳에서 곧 사장으로 데뷔하는 그의 사업계획표는 일단 마흔다섯살까지가 데드라인이다.

그때까지 열심히 뛰어 승부를 내고나면 여행도, 일도 더 자유로이 즐기며 살겠다는 계획이 서있다. 그렇다고 그의 스케줄이 느슨해질까? 아직 본격개업도 하지 않은 문 밖에선 이미 그를 찾아온 '대기조'가 앉아서 은근히 부담을 주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딱딱 풀리는 걸 보면 저도 에너지가 솟습니다. 그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그것뿐일 겁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더 하고 싶어질지 저도 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한번 해봤던 일은 더 안할 것 같습니다. 얼마전 김용택 시인의 시낭송회에 갔을 땐 갑자기 산골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옆에서 웃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갑갑해서 못 있을거다.' 정말 제가 그래보여요?"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2/21 10:59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