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개성시대] 튀는 맛, 튀는 라면으로 승부

아이디어라면 출시 봇물, 입맛따라 '맞춤라면'

"라면"하면 떠오르는 맛은? 첫째 쫄깃쫄깃한 면발, 둘째 얼큰하고 뜨끈뜨끈한 국물, 셋째 라면 국물에 만 찬밥이나 뭉글뭉글 풀어넣은 계란.

어쩐지 밥이 내키지 않을 때, 늦은 오후나 한밤중에 속이 출출할 때, 혹은 간밤의 술로 지친 속을 간단하게 풀고 싶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얼큰하고 쫄깃한 라면 한 그릇은 누구에게나 대단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찬밥을 말아먹거나 계란 하나 풀어넣으면 더할 나위 없다. 만들어 먹기도 간편하고 1,000원짜리 한장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라면은 그야말로 대중적인 음식이다. 정신없이 젓가락질을 하다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경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번 이상 겪는 일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1999년 네티즌의 투표를 근거로 발표한 바에 따르면 1963년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라면은 TV, 자동차, 아파트와 함께 20세기 한국인의 생활을 바꾼 10대 상품중 하나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라면 맛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라면이라고 다 같은 맛이 아니기 때문. 농심 오뚜기 삼양 한국야쿠르트 빙그레 등 회사마다는 물론이고 같은 회사라고 해도 상표에 따라 맛이 틀리다.

최근들어 이같은 경향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각 회사별로 기존의 라면에 여러가지 특성을 첨가하거나 아예 새로운 라면을 내세운 각종 아이디어 라면들이 잇달아 출시되고 있는 것.

이에 따라 라면을 먹을 때도 특정 회사, 특정 브랜드의 라면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아이디어 라면의 가장 큰 공통점은 특정 집단을 겨냥한다는 것. 기존 라면이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약간의 맛의 차이만 강조했던데 반해 최근 출시된 아이디어 라면의 주류는 타깃이 되는 소비자층을 분명히 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맛과 기능을 첨가하는 일종의 '맞춤 라면'이다.

또 아이디어 라면의 등장 초기에는 팜유 대신 콩기름을 사용하거나 화학조미료인 MSG를 제거한다거나 칼슘을 첨가하는 등 건강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맛과 용량, 용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하다.


맛· 양 천차만별

세대별 맞춤 라면으로는 최근 오뚜기가 내놓은 '힘라면'이 전형적이다. 힘라면은 용량이 140g으로 기존 라면(120g)보다 17%나 양이 많다. 10대와 20대 남성을 주타깃으로 했기 때문. 이 나이의 남자들은 보통 라면 한개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그렇다고 두개 먹기는 좀 부담스럽다.

힘라면은 이러한 소비자의 심리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단순히 양만 늘린 게 아니라 인삼 마늘 버섯 등 건더기 수프를 첨부해 한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한 라면이라는 제품 이미지를 심으려하고 있다. 오뚜기측은 주로 편의점을 대상으로 판매에 주력하고 있으며 월 매출액 목표를 20억원으로 잡고 있다.

농심이 지난해 3월 출시한 '춘면'의 컨셉은 힘라면과 정반대다. 메밀맛과 녹차맛, 두 종류가 있는 춘면은 일식집의 메밀국수를 응용한 것으로 소스에 찍어 먹도록 되어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라면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춘면은 기름에 튀겨 수분을 제거한 유탕면(油湯麵)이라는 점에서는 엄연히 라면으로 분류된다. 다만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아이디어를 살린 것이다.

라면을 좋아하면서도 다이어트 때문에 기름에 튀긴 라면을 꺼리는 여성을 겨냥, 깔끔한 맛에 기름기를 제거했다. 빙그레가 지난달 출시한 '뉴 맛보면'도 기존의 주력상품인 '맛보면'에 식이섬유를 첨가하고 소고기 맛을 강화해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으면서 깔끔한 맛을 좋아하는 10대, 20대 여성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신세대 겨냥한 아이디어 제품 봇물

어린이와 청소년도 빼놓을 수 없는 라면 소비자다. 빙그레는 지난해 10월 양이 적은 어린이 고객을 겨냥, 기존 라면의 양을 86g으로 줄인 '매운콩 종이컵 레귤러'를 판매하고 있다.

빙그레는 또 청소년이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착안, 라면에 떡볶이 소스를 첨가한 '캡틴 라볶이'를 일찌감치 시장에 내놓았다. 매운콩 종이컵 레귤라는 빙그레의 용기면 판매의 20%에 육박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 용량을 줄인 어린이용 라면은 삼양식품에서도 개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을 알려졌다.

이같은 세대별 맞춤 라면 외에도 기발한 아이디어 라면도 많다. 지난해 나온 한국야쿠르트의 '새콤달콤 시원면'은 끓여먹는 라면이 아니라 물에 말아먹는 라면. 기존의 비빔면과 물냉면을 응용한 것으로 180억원 규모의 계절면 시장에서 썩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오뚜기가 지난해 내놓은 '빨개면'도 특이한 이름과 고춧가루를 뿌린 새빨간 면발색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했다. 보기에는 새빨갛지만 맛은 기존의 매운 라면보다는 덜 매워 아주 매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특히 젊은층에서 반응이 좋았다.

한편 빙그레가 1999년 처음 출시한 '매운콩 종이컵'과 오뚜기의 '애니 타임'은 용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시킨 예다. 기존의 컵라면 용기인 폴리스틸렌이 환경 호르몬을 유발시킨다는 비판을 적극 수용해 대안으로 내놓았다. 종이컵은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고 폴리스틸렌 컵에 비해 잘 식지 않아 지난해에만 2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했다.

또 종이컵은 썩지 않는 1회 용품의 사용을 절감한다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애니 타임 역시 폴리프로필렌으로 용기를 만들어 전자 레인지로 조리해도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오뚜기측의 설명이다.

면발과 수프도 아이디어 적용 대상이다. 삼양식품의 '수타면'은 국물에서 면발로 발상의 전환을 했다. "원형으로 뽑혀져 나오는 면발에 굴곡을 주어 면대의 결방향을 사방으로 퍼지게 해 밀가루의 글루텐 조직을 활성화함으로써 보다 부드럽고 쫄깃쫄깃한 질감을 낸다"는 것이 삼양측의 자랑이다.

'업그레이드된 면발'이라는 제품 이미지로 출시 3개월만에 월 30만 상자가 팔리는 등 신제품으로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한국야쿠르트의 '팔도 짜장면'도 기존의 가루식 수프대신 액체로 된 짜장을 부어먹도록 했다. 경쟁 품목인 농심 '짜파게티'나 삼양 '짜짜로니', 오뚜기 '짜장파티'에 비해 짜장면에 더 가까운 맛을 낸다고 한다.


시장침제 벗어나려 안간힘

식사 대용식 대신 과자로서의 라면을 내세우고 있는 아이디어 라면도 있다.

이른바 '부숴먹는 라면'이다. 1960-1970년대의 '라면땅'을 연상시키는 부숴먹는 라면은 물을 부어 끓여먹지 않고 생라면에 수프를 뿌려먹는다. 1999년 출시 두달 만에 50억원의 판매실적을 올리며 대박을 터뜨린 오뚜기의 '뿌셔뿌셔'를 시작으로 삼양식품의 '빠삭빠삭', 한국야쿠르트의 '뿌요뿌요', 농심의 '펀치면' 등이 잇달아 출시되었다.

어린이들은 물론 라면땅의 향수를 즐기려는 어른들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최근 들어서는 인기가 한풀 꺾였으나 아이디어 라면의 시장성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이같은 아이디어 라면의 붐은 라면 시장이 겪고 있는 경제적 침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라면 시장의 규모는 약 1조1,740억원대. 5대 라면회사의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상반기를 기준으로 농심이 압도적으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오뚜기와 라면회사의 원조인 삼양식품이 그 다음, 그리고 한국 야쿠르트와 빙그레 순이다.

5개 회사가 내놓은 라면을 모두 합하면 120여 가지 종류가 있으며 1년에 37억8,000만개 정도가 소비된다. 국민 한사람 당 1년에 약 84개의 라면을 먹는 셈이다. 라면 형태로는 봉지면이 73%, 용기면이 27% 정도의 비율이다.

하지만 IMF 한파가 한창인 1998년 급성장을 했던 라면 시장은 계절적 비수기인 지난해 여름을 시작으로 하반기에도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금액기준 1.2%, 수량으로는 불과 0.8% 증가에 그쳤다.

라면업계의 한 관계자는 "벤처 붐과 증시가 사그러들면서 야근이 줄고 전체적인 소비가 감소한 것이 그 주된 이유"라고 설명한다. 올해도 4% 내외의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지배적이다.

업계에서는 각사마다 1년에 10개 정도의 신제품이 쏟아져나오는 라면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평범한 라면보다는 보다 새롭고 기능적인 아이디어 라면으로 틈새시장을 공략, 판로를 넓히지 않을 수 없는 것.

아이디어 라면의 매출액이 아직 미미한 수준임에도 각 사에서 보다 많은 아이디어 라면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농심 홍보실의 최호민 과장은 "라면은 늘 소비자의 생활 패턴 및 기호의 변화를 반영해왔다. 앞으로는 건강, 편리, 만족을 원하는 시대적 추세에 맞춘 다양한 아이디어 라면이 치열한 시장쟁탈전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03/14 20:38


김지영 주간한국부 koshaq@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