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전 증권맨 강태용씨의 노점상 3년

더위만큼 치열한 패자불활전

강태용(38)의 여름은 치열하다. 섭씨 30도가 넘는더 위에 후끈거리는 가스불열기까지 껴안은 채여의도를 지키고 앉아 있다. 선풍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포장마차의 비닐까지 내려 조금의 바람 기운까지도 일부러 막아 놓았다. 확실한 이열치열의 피서법이다.

“ 정 더울 땐 여기서 몇발짝만 밖으로 나가도 시원합니다. 남들은 그곳도 덥겠지만 저는 오히려그 쨍쨍한 도로가 시원합니다. 사람 몸이란 게 참 간사하죠? ”

그는 간이포장마차에서 만두장사를 한다. ‘강씨 손만두’가 작은트럭 위에 걸린 그의 가게 이름이다. 기동성 하나는 1등이다.

핸드폰(017-205-3493)으로 주문을 받고, 여의도 어디든 배달 오토바이가 달린다. 정작그가 땀을 흘리는건 오후 너댓시부터다. 직장인들의 간식 주문을 받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장사 3년만에 일대를 장악했다.


잘나가던 직장생활 15년, IMF로 퇴출

그는 원래 증권맨이었다. 1998년 3월 구조조정 여파로 퇴출당한 IMF의 희생자중 하나다. 현재 그의 이동식 포장마차가 진을 치고서 있는 바로 앞 신한증권 건물은 다름아닌 그의 15년 직장이었다.

연봉 4,000만원, 영업실적 상위10%이내, 요즘 같은 성과급으로 치면 연봉 4-5억원대에 상당하는 능력있는 사원이었다. 노조 창립멤버에다 부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퇴출 당시 6억여원의 빚을 안고 있었다. 여늬 샐러리맨들처럼 조금의 부채를 갖고 있던 와중에 증권사의 관행처럼 행해지던 약정매매를 했다가 대출받은 돈으로 밀어넣은 주식가격이 갑자기 추락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수억대 채무자가 되고 말았다.

월급은 물론 집이며 가재도구까지 차압이 들어왔고, 얼마 뒤 IMF까지 닥치자 투자관리상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감원대상이 되었다.

“ 저 외에도 당시 영업점 직원들 약 70-80%가 잘렸습니다. 처음엔 너무도 막막해 사장님께 제발 한번 더기회를 달라는 청원서까지 몇 번이나 올렸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때잘린 사람들 절반이상은 그 후 이혼을 당하면서 가정까지 파탄났습니다.

그나마 온전히 남은 경우에도 지금까지 제대로 재기한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신용불량자로 찍혀 취직도, 생활도 쉽지않자 할 수없이 부인만 파출부로 보낸 채 자신은 술로 하루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

그 후 3년간 생존의 위협속에 살아왔다. 가족만 아니었으면 어떤 사고를 쳤을지 모른다. 죽고 싶었다. 어렵게 장만한 34평짜리 아파트를 빚쟁이에게 넘기고 보증금 800만원 월 14만원짜리 현재의 월셋방으로 옮겼을 땐 누구보다 노모가 대성통곡했다.

당장 가족들 끼니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뇨병을 앓는 노모와 어린 두 딸, 그리고 셋째를 임신한 아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좌판이라도 나서고 싶었지만 가장무서운 상대는 자신의 자존심이었다. 아내에게 숨긴채 혼자 서울역에 나갔다.

“나는 이러이러한 곳에서 퇴출당한 사람인데 앞으로 새 삶을시작하려고 한다”며 아무도 청하지 않은 웅변을 시도했다. 첫날엔 눈치만보고 돌아왔다가 1주일쯤 지나자 사람들 앞에 큰절까지 올릴 수있게 됐다. 한 달만에 겨우 용기가 생겼다.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외판원부터 시작해 중부고속도로 초입에서 운전자들에게 뻥튀기를 파는 일도 해보았고 짬짬이 주유소 주유원으로도 뛰었다.그 자리 하나를 파고드는데도 수없이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붕어빵 장사도 기계 값 때문에 포기했다. 사촌 동서에게 어렵사리 50만원을 빌려 군고구마 장사에 나섰다. 20만원으로 고구마통과 천막용 비닐, 재료 등을 사고, 남은 30만원은 과감히 홍보비용에 투자했다.

자신의 캐릭터와 전화번호를 새겨넣은 개량한복에다 광고용 스티커를 준비했다. 자리는 자신의 전 직장앞 인도 한 켠이었다. 그 빌딩만큼은 최소한 자신을 쫓아내지는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대의 건물과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스티커를 돌렸다. 얼마전까지도 막역한 사이였던 자신의 전 직장사무실에도 들어가 동료, 상사들에게 깍듯이 존대말을 쓰며주문을 부탁했다. 애써 만들어 나눠준 스티커가 거리에 버려진 것을 볼땐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울고 나오기도 했다.


외판원, 주유원 등 막일에서 만두장사로

임신으로 몸이 불편한 아내까지 자신을 돕겠다며 거리로 나왔을 땐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아내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까지 얻었다. 질좋은 고구마를 일일이 씻고 닦아 깨끗이 조리하는 한편, 집에서 직접 담궈준 동치미로 제법인기를 끌었다.

“ 집사람 덕분에 장사도 잘 됐고, 그 동치미 맛이 좋다고 일부러 자기 부인까지 데려와 배워간 손님도 있었습니다. 집사람이 그만큼 저를 믿고 따라준 이유요? 원래 가정에 충실한 편이었습니다. 하루 세 갑씩 피우던 담배도 아내랑 뽀뽀한다고 싹 끊었던게 저니까요. (웃음) ”

그러나 그것도한 철. 겨울이 끝나자 새롭게 만두장사를 시작했다. 투자전략에 민감한 전문직 출신답게 나름의 경쟁력도 구축했다.

“ 만두 만드는 법을 배우러 다니다보니 시중의 만두 대부분이 중국산 무말랭이에다 돼지비계를 버무려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버무리면 꼭 고기처럼 보이거든요.

원가를 절감하려고 쓰는 방법인데, 그 때문에 맛이 느끼한 겁니다. 아무리 허름한 노점이라도 할 땐 제대로 해보자 싶어 우린 처음부터 살코기만 쓰면서 22가지 재료를 아낌없이 넣었습니다.

만두피도 밀가루에다 이스트를 넣고 찬물로 반죽하는 기존제품과는 달리 세가지 종류의 밀가루에다 마까지 섞고, 집사람과 의논해 반죽법 자체도 바꿨습니다. 만두피를 만드는데만 6시간이 걸립니다. 그 비법을 찾기까지 집에서 별별방법으로 다 실험해 봤었습니다. ”

좋은 재료만 쓰다보니 손님들의 반응이야 좋지만 상대적으로 마진이 낮다. 게다가 가뭄으로 배추값이 오른 요즘엔더 손해 막심하다. 손익계산엔 누구보다 전문가인 그가 이 어리석은 장사를 모를리 없지만 그에겐 또 다른 계산이 있다.

독자개발한 이 만두와 캐릭터로 머지않아 전문사업체를 일으켜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 덥고비좁은 포장마차안에서 그는 미래의 전문 매장설계도까지 하나하나 머리속에 그려넣고 있다.

천막 신세에서 소형 트럭으로, 게다가 옛직장 노조에서 기증해준 배달 오토바이까지 얻는 동안 남모르는 봉변도 많았다.

초창기엔 밤사이 수시로 천막째 도둑을 맞는가 하면 한번은 젊은 노숙자가 안돼 보여 도와줬다가 돈을 몽땅털리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직접 붙잡은 뒤에도 ‘양심이 있으면 조금은 남겨놓고 털어야 될 것 아니냐’며돈의 일부를 상대에게 쥐어주었다. 팔고 남은 군고구마를 노숙자들에게 주려고 가져갔다가 ‘고작이것밖에 안 가져왔냐’는 어처구니없는 핀잔도 들었다.

그 뒤부턴 양로원과 보육원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구청이나 파출소의 단속은 워낙 자주 당하다보니 이력이 났다. 현재까지 부과받은 벌금만 약 400만원. 인근주민들도 웬만큼 양해해주는 상황에 단속반의 실적올리기용으로 사정없이 들이닥치는 단속행정도 무섭지만, 벌금을 낼래야낼 돈도 없다.

임신중 빈혈이 심했던 아내에겐 제손으로 약 한번못 사준 게 가슴에 얹혀있다. 재작년엔 강씨 자신도 천식이 악화돼 병원에 실려갔다. 집에서 쓰러지고도 병원비가 없어 가족들이 발만 구르다가 119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현재도 하루 두어차례 기관지 확장제를 이용해야 하는 처지다.


법원으로부터 개인파산 선고, 한시름 덜어

그래도 큰 희망이 생겼다. 지난해 9월개인 파산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몇 년 사이에 이자가 불어 빚이 9억1,000만원까지 늘었는데, 38개 채권자의 채무금액(빚)에 대한 그의 지급불능 상태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 소송비용도 신한증권 유영상 사장이 부담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면책복권이 이뤄질 경우, 다시 그를 채용하겠다는 의사도 밝힌 상태다.

파산선고에 이어 작년 추석엔 면책복권 신청에 들어간 상태. 그것까지 받아들여지면 그는 완벽한 새 삶을 시작할수 있게 된다. 오는 7, 8월경 결정여부를 알 수있을 것으로 그는 예상하고 있다.

앞으로 그에게 열린 길은 두가지. 전 직장에 다시 들어가거나 면책복권이 무산될 경우 각오했던 대로 만두사업에 새로운 승부를 거는 길이다. 그 어느것이 됐든 그의 삶엔 더 이상 절망스러울 것이 없다.

“한번은 실패했지만, 아직 내인생이 끝장 난건 아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작년엔 한 외국 언론매체에까지 그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세계굴지의 한 외국계증권사에서 채용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연봉 2억5,000만원짜리의 자리였지만 거절했다. 펀드매니저의 꿈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첫 직장이자 평생직장으로 여겼던 전 직장외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 언제 어디에 있든 정직하게 살면 반드시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엔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게 다 헛된 꿈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척조차 내가 정말 어려울땐 남보다 더 매정해지는 게 현실입니다.

결국엔 자기자신이 헤치고 나오는수 밖에 없습니다. 한때는 왜 내게 이런일이 벌어졌을까 그생각뿐이었지만, 뭣보다 빨리 현실을 받아들였기에 여기까지라도 올 수있었던 것 같습니다. ”


욕심버린 삶 “새로운 길이 보이네요”

그는 요즘 느리게 사는 행복을 확실하게 배우고 있다. 증권사 시절엔 멀어졌던 책들이 포장마차 안에서는 가까워졌다. 여의도 전체가 텅 비는 주말엔 할 수없이 장사도 휴업해야 하지만, 그 대신 집앞 작은 텃밭에서 가족들과 함께 고추와 감자 등을 키우는 기쁨도 있다.

당뇨병이 악화된 노모 곁에는 아내가 있고, 일곱살밖에 안된 큰 아이는 제동생들을 가르친다고 벌써 의젓한 티를 낸다. 많은것들을 잃고 난뒤 오히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다.

“ 우리 방엔 다섯 식구가 한데 끼어서 잡니다. 밤중이면 막내의 발이 제얼굴을 덮치기도 하지만, 이따금 새벽에 깨어나 그런 식구들 얼굴을 바라볼 때면 가슴 찡하도록 행복해집니다. ”

첫 인사때부터 ‘우리만두 맛을 꼭봐야 한다’던 그는 헤어질 때 온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자신의 만두 한 통을 기어코 손에 들려주었다. 인터뷰중 수시로 그를 찾는 손님들 중 절반은 길을 묻는 사람들이었다.

그 ‘영양가 없는’행인들까지도 그는 일일이 밖으로 나가 친절하게 길 안내를 했다. 어떨 땐 그 친절함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찾아와 만두를 먹고 가는 손님도 있다고 했다. 이글거리는 여의도 열도(熱島)안에 한 점 섬처럼 앉은 포장마차. 삶이든 여의도 지리든 그처럼 길눈이 밝은 사람도 사실흔치는 않을 것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기자

입력시간 2001/06/1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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