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대문구 행촌동 권율장군 집터

접대장소에서 땅이름이나 산이름, 누각의 이름을 접대손님에게 지어달라고 하는 길이 그 손님에 대한 최고의 대접이자 예우였던 것이 역대 조정의 관례였다. 조선조 중종(中宗) 32년 3월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서울에 왔을 때 일이다.

중종은 사신을 경회루에 초치,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북쪽에 우뚝 솟은 삼각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 이름을 바꾸고 싶다면서 이 명나라 사신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임금이 굳이 명나라 사신에게 서울의 주산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것은 진심으로 그 산이름을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신을 환대하는 예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개명된 땅이름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그 이름을 쓰질 않고 옛이름대로 불러 오늘에 이른 것이 우리 땅이름이다.

이 환대에 응한 사신은 삼각산은 북쪽에 자리한 만큼, 공북(拱北)이요, 인왕산을 필운(弼雲)이라 짓고 부언하기를 우필운용(右弼雲龍)이라 했다. 운용은 곧 나랏님을 오른쪽에서 보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복궁의 정전에서 보면, 이 산이 마치 오른쪽에 자리하여 임금을 보필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 필운은 산이름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다만 그 산아래 경치좋은 계곡 언저리의 땅이름 쯤으로 남아 있다.

순조때 김매순이 쓴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에 따르면 ‘도성화류 3월이 막바지인지라…, 남산의 잠두(蠶頭), 삼각산의 필운대(弼雲臺), 세심대(洗心臺)가 제일 놀이꾼이 많이 모인다’라고 쓰고 있다.

또, 고종초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이항복(李恒福)이 젊었을 때 필운대 아래쪽 마을에 있던 장인인 권율(權慄)장군의 집에서 살았었다.

이항복은 스스로 그의 호를 필운이라 하고 그 집 뒤 바위에 ‘필운대’라는 석자를 새겨 놓았다. 필운대 근처 마을에는 꽃나무들이 많아 서울 사람들이 이곳을 제일 먼저 즐겨 찾는다’했다. 그래서 땅이름도 행촌(杏村)이라 했던가.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권율은 조정에 우뚝서서 일을 만나면 우뢰처럼 움직여 출입하고 변통함과 막힘이 없으면서도 바른 길을 결코 잃지 않는 권태사(權太師:권씨의 시조 권행(權行))의 유풍(儒風)과, 바라보면 의젓하고 가까이 가면 따사로워 친화로써 사람을 대해 진정 심복하게 만드는 권양촌(權陽村:권율의 조상)의 미행(美行)과, 높고 큰 풍채를 의젓이 바로 가지며 일을 당하여서는 굳고 꿋꿋하나 절박하여 까다롭지 않은 그의 아버지 영의정 권철의 국량(局量;도량과 재간)을 두루 갖추었다. 공은 이 세가지를 겸하여 가졌으되, 공훈과 충렬은 이 세사람 보다 더하였다.’

권율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곳곳에 그의 인간적인 대인관계나 부하관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 잘 친화하고 사랑으로써 대해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그를 쫓아 복종하므로써 위급할 때에 힘입었던 것이다.’ 이상은 ‘일월록(日月錄)’의 글이다.

그의 부하관리 방법은 친밀한 인정관리였고, 이 인정관리가 인치(人治)로 이어져 웅치대첩, 행주대첩을 있게 했을 것이다. 그의 인치는 오늘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구조조정’을 부르짓는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세월은 가고 그의 생가터엔 500여년 수령의 우뚝선 은행나무가 권율의 풍채를보여주는 것만 같다.

입력시간 2001/07/1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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