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68)] 망가(漫畵)

도쿄(東京) 등 대도시의 지하철에서 문고판이나 신문을 열심히 보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세계적 화제가 됐다. 초밥을 다져 넣은 듯한 콩나물 시루 전철 안에서도 열심히 무언가를 읽는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태반이 '망가'(漫畵)로 바뀐 것이 과거와 다르다면 다르다.

남녀노소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만화 특유의 장점이 되도록 심각한 읽을 거리를 피하는 풍조와 맞물린 결과이다. 이런 추세는 일본 대중문화 가운데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던 만화의 상대적 지위를 더욱 끌어 올리고 있다.

10여년간 이어지고 있는 장기 불황은 출판 왕국의 출판계에도 그림자를 드리웠고 출판사의 돈줄로 여겨져 온 만화에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1992~94년을 절정기로 만화 단행본과 잡지 발행은 조금씩 줄어 왔다.

그러나 그나마 타격이 덜하고 자금 회수가 빠르다는 점에서 출판사들의 만화 발행 열기는 식을 기미가 없다.

2000년 일본 만화 시장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청소년 주간지는 4억부 이상, 성인용 주간지는 2억2,000만권 이상이 발행됐다. 월간지까지 합치면 10억부가 넘는다.

고단샤(講談社)의 '주간 소년 매거진'이나 슈에이샤(集英社)의 '주간 소년 점프'는 각각 발행부수가 380만, 360만에 이른다. 또 단행본은 약 5억부, 판매액으로는 2,372억엔에 이르러 전년보다 3% 늘어났다.

일본 만화에 대해서는 잔인하다거나 지나치게 야하다는 평가가 많다. 순정물, 탐정물, 무협물, 기업물 등 제한된 범위의 만화를 대해 온 우리 눈에는 그렇게 비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일본 만화의 장르 폭이 한없이 넓고 같은 성인물에도 여성 전용, 또는 SM(새디즘과 매조키즘) 전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세분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단행본으로 1,000만부가 팔리고 한국에도 번역 출판된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 인기 만화에서는 그런 특징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한편 컴퓨터게임과 만화 영화 등의 발달도 일본 만화의 힘을 북돋우고 있다. 세계적인 '포켓몬'(PocketMonster) 열기에서 보듯 만화의 인기는 만화 영화, 게임소프트웨어와 맞물려 폭발하고 있다.

여배우들만으로 이뤄진 스타 산실 '다카라즈카'(寶塚)극단이 올들어 '베르사이유의 장미' 부활 공연에 나섰듯 전통 장르와의 접합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인기 만화 내용을 그대로 옮긴 파칭코도 속출한다.

일본에서 만화가 이처럼 성행하는 것은 뿌리깊은 만화의 전통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근대 서양식 만화가 전해지기 오래 전부터 일본에는 '도바에'(鳥羽繪)라고 불린 만화가 있었다.

12~13세기에 제작된 '조주진부쓰기가'(鳥獸人物戱畵)라는 4권짜리 풍자만화를 비롯,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만화도 여럿 있다. '도바에'라는 이름은 대승정 지위까지 오른 승려 도바가쿠유(鳥羽角猷;1053~1140년)가'조주진부쓰기가'의 작자로 알려진 데서 비롯했다.

에도(江戶)시대에 들어 크게 발달한 '우키요에'(浮世繪)가 만화 냄새가 많이 풍기듯 역대 풍속화가들도 만화를 즐겨 그렸고 단행본으로 대중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만화는 주로 '폰치'로 불렸다. 1862년 요코하마(橫浜) 외국인거류지에서 영국인에 의해 창간된 만화잡지 '재팬 펀치'에서 나왔다.

초기의 서양 만화가 군주나 귀족 비판에 힘을 쏟았던 데서 나온 이름으로 지금도 일본의 만화 잡지 가운데 '~펀치'가 많다. '도바에'라는 고유어 대신에 와전된 '폰치'라는 말을 즐겨 쓴 일본인들의 의식은 만화라는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 중국에까지 수출하고도 요즘은 거의 '코믹'(Comics)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과도 통한다.

만화라는 말은 1890년대 들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필을 뜻하는 한자어의 만필(漫筆)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그런 식의 그림을 부르기에 적합한 말이었지만 출발은 전혀 달랐다.

일본 문헌에 만화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71년 스즈키 간고(鈴木煥鄕)의 '만카쿠즈이히쓰'(漫畵隨筆)이다. 그림이라곤 전혀 없는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 옛 문헌을 인용, '큰 바다에 만화라는 새가 있어 하루종일 물위를 오가며 물고기를 잡아 먹고도 배부른줄을 모른다, 나도 무엇 하나 능한 것 없이 종일 책을 읽고 있으니 만화와 같다'고 적었다.

만 권의 책을 섭렵하고도 금기서화(琴棋書畵) 어디에도 빼어나지 못하다는 겸손을 담은 말이지만 전철 안에서 옆사람의 만화책에까지 눈길을 옮기는 모습과도 어딘가 통한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1/07/2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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