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중구 서소문(昭義門)

서소문(西小門: 昭義門)은 옛날 서울 도성의 서남쪽 즉 숭례문(남대문)과 돈의문(서대문)사이에 자리했던 작은 문이었다. 조선조 태조 5년(1396년) 도성이 축조될 때 함께 지어져 소덕문(昭德門)이라 불렀다.

그러나 성종 3년(1472년)에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韓)씨에게 휘인소덕(徽仁昭德)이란 시호를 올렸기에 그 ‘소덕’을 피하여 ‘소의’로 고쳤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중간에 문루가 없어졌다가 영조 19년(1743년)에 다시 제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1914년 12월, 일제가 무슨 도시 계획을 한답시고 털어 없애버렸으니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서소문동과 서소문로가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좀더 관심을 가지고 숭례문에서 서북쪽 건물사이를 비집고 능선길 뒷골목을 따라 옛 명지대와 배재학교 자리, 그리고 정동교회-이화여고쪽으로 이어지는 성터를 어림잡으면 서소문 자리를 가늠할 수 있다.

문은 성벽과 길이 만나는 곳에 짓게 마련. 옛 서울의 지도를 보면 소의문은 분명히 남별궁(南別宮 : 圓丘檀 :오늘날 웨스턴 조선호텔)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에 자리하고 있다.

서소문동 120번지 일대에는 생사당(生祠當 : 宣武祠)이라 하여 선조 31년(1598년)에 임진왜란때 명의 원병으로 와서 공훈이 많은 명나라 장수 형개(邢价)와 양호(楊鎬)를 기리는 선무사가 있기도 하였다.

이 선무사는 두 장수 모두살아있는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생사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 뒤 선혜청(宣惠廳)의 새 창고를 설치, 새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새창골(新倉洞ㆍ司倉洞)이라는 땅이름이 오늘날 신창동. 그래서 서소문을 나서면 무악재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개울이 있었다.

그 개울 위로 다리가 놓여 있었으니 헌다리(이橋)요, 그 다리를 건너 큰고개(大峴)를 넘어 양화나루(楊花津)로 이어졌다.

한강의 수운이 살아있는 시절에는 사람과 물산의 통행이 꽤나 많은 길이었다. 마포의 새우젓배, 소금배가 득실거렸는가 하면, 용산나루에서 만초내(曼草川: 旭川)를 따라 1인용의 작은 쪽배(片船)들이짐을 싣고 새창골까지 와닿았다고 하니, 꿈 같은 시절의 이야기다.

서소문밖 하천가에 소금을 쌓아 두었다가 그만 소금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염천(鹽川)이 되기 일쑤였다. 그 흔적이 오늘날 ‘염천교(鹽川橋:서울역 북쪽)’다.

한말에는 서소문동 120번지 일대에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의 병영이 있었고, 56번지에는 시위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영막사가 있었다.

그런데 순종 융희 원년(1907년) 8월 1일 8시를 기해 대대장 참령 박성환(朴性煥)이 일본의 강권에 의한 조선 군대 해산을 반대, 권총으로 자결하자 이를 본 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군과 교전, 일인병사 4명을 죽이고 31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는 도시계획을 통해 서울의 옛스런 모습을 싹 바꾸려 했지만 이 길은 ‘서소문로’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살아있다.

서소문로가 아현동쪽으로 나아가다가 중앙일보사 조금 못미쳐서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도성과만나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 곳에 바로 ‘소의문:서소문’자리. 소의문은 비록 역사의 뒤안질로 사라졌지만 땅이름이 ‘서소문동’이요. 길이 ‘서소문로’이니, ‘소의(昭義)’의 ‘의(義)’자 탓일까!

<사진설명> 일제에 의해 헐리기 전의 소의문 모습.

이홍환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1/12/2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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