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인사는 "섞어찌개 잔치"

지역안배 고려한 나눠먹기식 관행 여전, '직위공모제' 제도적 보완 필요

역시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지난주 막을 내린 외교통상부 인사는 이전의 인사 처럼 무성한 잡음과 구설수만을 남겼다. 원하는 직위에 응모하고, 최적의 자격을 갖춘 지원자에게 직위를 부여하는 직위공모제(JobPosting)가 정부 부처중 처음 실시돼 외교부 직원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지만, 인사 결과를 본 직원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능력에 따라 보직을받는 직위공모제의 장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외교부의 그간 행태를 감안하면 실망스러울 정도다.

더욱이 이번 인사에서도 주러 대사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방러시 과잉의전 논란에 휩싸여 전격 교체되는 등 정치 바람이 거세 외교부 분위기는 한층 어수선하다.


'특정지역 우대' 부작용 피하기 역력

외교부 직원 1,500여명중 대사급 17명을 포함, 230명이 자리를 옮긴 이번 인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능력 보다 지역안배에 치우친 나눠먹기식 인사와 특정 대학 출신의 약진이었다.

지난해 말 본부 국장급 6명의 인사내용이 발표되자 외교부 직원들은 출신지역을 ‘황금분할’한 인사내용에 놀랐다.

인천, 전북, 대구, 충북, 충남, 경남 출신 간부들이 골고루 6개 국장에 보임됐기 때문이다. 한 젊은 외교관은 “실력과 업무위주로 인사를 하겠다는 취지로 직위공모제가 도입됐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사 결과는 지역과 학연 등 내부 권력 관계를 적절히 반영한 것일 뿐”이라며 “이렇다면 굳이 직원들이 지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섞어찌개’가 맛이 좋으면 괜찮겠지만 부하 직원들은 그 맛을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인사결과를 평가 절하했다. 한마디로 특정지역 우대라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안전위주’의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인사가 되다 보니 치열한 경합을 보인 자리 일수록 출신지역이 낙점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대표적 사례로는 해외공관장 2명이 치열한 경합을 벌인 본부의 모 국장직과 2명의 차관보급 인사가 다툰 본부의 모 실장직 이었다.

결과는 1명의 호남인사와 1명의 비호남인사가 분루를 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 두자리는 막판에 인선내용이 바뀌어 아직도 ‘탈락한 인사가 더욱 적격이었다’느니 등의 뒷말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출신 지역의 산술적 배분 못지않은 부작용은 외교부 직원들이 특정대학 출신이 우대를 받았다고 느끼는 정서다. 직원들은 한승수 외교부 장관의 출신 대학인 연세대 출신 인사들이 이번에 우대를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외교부내 ‘G7 요직’중의 하나로 꼽히는 통상교섭조정관 자리와 본부 국장직 1자리에 연세대 출신 인사가 임명됐기 때문인 듯 하다.

특히 해외공관장에서 통상교섭조정관으로 자리를 옮긴 K씨의 경우 공관장으로 나간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번에 본부로 들어와 구설수에 휩싸이기도 했다.

가급적 3년인 공관장 임기를 채우도록 공관장 인사이동을 최소화하겠다는 당초의 외교부 공식입장과 분명 배치되는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일부 직원들은 “언제부터 외교부에 특정대학의 몫이 있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인사 담당자들은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이라며 “특정 대학 출신이라고 지칭되는 2명의 인사 모두 해당 직위를 맡을 만한 충분한 경력을 쌓았다”고 해명했다.


여전한 정치바람, '줄서기 경고' 의미도

아울러 이번 인사에서도 정치권의 바람은 여전했다. 이재춘 주러대사가 정태익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 최상용 주일대사가 조순형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전격 교체됨으로써 증명됐다.

특히 이재춘 대사의 경질은 그랬다. 외교부는 4강외교의 강화차원에서 교체한 것이며, 과잉의전 구설수가 나오기 이전부터 이 대사의 교체를 검토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야당과 언론을 설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외교부 안팎에는 이 대사의 교체가 정권교체기 마다 줄서기에 익숙한 외교관들에 대한 경고로 해석한다.

비록 이 대사가 ‘이 총재 방러에 최대한 협조하라’는 본부 지시를 따랐지만, 여권핵심부는 이 총재 일행 사석에서 노래까지 한 이 대사의 행태가 ‘업무적협조’ 보다는 ‘자발적 협조’의 냄새가 짙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일벌백계 차원에서 경질이 결정됐다는 분석이 그럴듯하게 퍼져있다.

조세형 고문의 주일대사 임명은 ‘논공행상’ 인사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 같은 인사는 결국한국외교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4강 대사들이 정치권의 바람에 떠밀려 임기도 채우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장기적 시각에서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우려를 낳았다.

이번 인사에서는 비난받을 대목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부 인사들은 자신들이 관리해온 경력에 어울리는 ‘제자리’를 찾기도 했다. 그래서 한 중견 외교관은 “직위공모제가 처음 실시된 이번 인사에서 일부 간부는 주특기에 따라 국장, 심의관, 과장으로 임명됐다”며“이는 후배 외교관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선망받는 부서인 북미국과 아시아ㆍ태평양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달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경력을 쌓을 경우 그 분야의 최고관리자와 해당지역의 대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커졌다는 얘기다.

젊은 외교관들도 “과거에는 자신이 러시아 관련 업무를 하고 싶더라도 미국관련 부서를 지원해야 겨우 러시아 관련부서로 옮길 수 있었다”면서 “이제는 굳이 미국 관련 업무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리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번 인사는 젊은 외교관들에게 ‘주특기’를 관리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계기였다.


"외교관 전문화"에는 긍정적 평가

경력관리 필요성은 국ㆍ과장인사를 최종 결정하는 인사위원회 심사결과에서 쉽게 드러난다.

한 인사 담당자는 “특정 직위의 지원경쟁율이 높게는 10대 1 을 넘었고, 이로 인해 인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투표를 통해 최종 낙점자가 결정된 사례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면서 “최종 낙점시 가장 크게 고려된 요소는 지원자가 해당 분야에서 어떤 경력을 쌓았고, 어떤 실적을 남겼는지 여부였다”고 전했다.

직위공모제가 외교관의 전문화라는 측면에서어느 정도 기여한 셈이다. 하태윤 외교부 인사기획담당관은 “첫 직위 공모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100% 성취했다고 자부할 수 없지만 직원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지원자중 최적격자를 선정하는 절차의 민주성은 이번 인사를 통해 확보했다고 본다”고 자평했다.

한편 첫걸음을 이제 막 뗀 직위공모제가 내년에도 계속될 것인가라는 회의가 나오는 현상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 외교관은 “현 정권이 도입해 실시중인 이제도가 다음 정권에서도 지속될 지에 대한 불신이 외교부내에 팽배해있다”고 전한다.

이정빈 전 장관시절 도입한 새 인사제도에 대해 고참 및 중견 외교관들의 반대정서가 잔존해 있고, 분명히 선진적인 인사 제도이지만 도입 취지를 살리기 어려운 현실의 벽도 두텁기에 이런 분위기가 가시지 않는 듯 하다.

이에 따라 외교부는 향후 제도적인 보완에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정치권도 업무 전문화를 꾀하는 외교부에 대해서도 영향력 행사를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영섭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2/01/17 10:57


이영섭 정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