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황규현(下)

한쪽 날개를 접고 살아야했던 '참 음악인'

1969년 여름 <애원>의 작곡가 박진하는 그룹 쉐그린의 리드보컬 황규현이 애절하게 토해내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반하며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

낮에는 레코드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트로트가수로 음악생활을 하던 그는 황규현을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스탠더드팝계열의 창작가요<애원>을 작곡했다. "생명력있는 가수가 되려면 외국곡이 아닌 가요를 불러야 된다"며 악보를 건내보았다.

"폼나는 외국곡도 아닌 촌스런 가요를 왜 불르냐"며 황규현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계속된 간청에 그룹 쉐그린과 함께 미도파 살롱무대에서 "새로 취입한 곡인데 한번 평가해 달라"며 시험삼아 불러보았다.

비트강한 하드록과 외국의 소울노래를 기대하고 왔던 팬들은 다소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몇일후 <애원>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당시 그룹 쉐그린은 미도파살롱과 우미회관, 에드훠의 보컬출신 서정길이 운영했던 관철동의 라틴쿼터등 여러무대를 겹치기로 뛸만큼 인기록그룹.

출연하는 무대마다 <애원>을 요구하는 팬들이 급속히 늘어갔다.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느라 분주할만큼 <애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라틴쿼터에서 공연준비를 하던 69년 가을 어느날, 킹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대뜸 "애원 한번 불러보라"며 다그쳤다. 음반취입경험이 없는 황규현은 히트곡 제조기로 명성이 드높던 킹레코드의 박성배사장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정길은 "돈하나 안들여도 판을 내줘 히트시키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귀뜸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촉촉한 노래를 들은 킹박은 숨쉴틈도 주지않고 "음반을 내자"고 재촉했다. 무일푼으로 집을 뛰쳐나와 노래를 부르며 근근히 생활하던 황규현은 30만원이라는 거액의 음반제작비가 있을리 만무.

'제작비는 걱정말라'는 제안에 녹음에 들어갔지만 이재에 밝았던 킹박은 성음제작소에 위탁제작을 맡기더니 결국 대지레코드 정사장에게 판권을 넘겼버렸다. 음반번호가 DG인 것은 이때문.

솔로데뷔를 꿈꾸며 마장동 스튜디오에 드나들며 '당시 가수들이 많이 드나들던 청계다방에서 음반을 내달라며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명의 김추자와 한민, 은희의 라나에로스포도 알게 되었다'고 추억에 잠긴다.

황규현의 솔로독립으로 그룹 쉐그린은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멤버였던 이태원, 전언수는 다시 합칠 가능성을 두기위해 <쉐그린>의 이름으로 포크듀오를 결성했다. 포크듀오<쉐그린>은 동물농장,얼간이짝사랑등 코믹포크송을 개척, 젊은층에 크게 어필하였다.

총12곡의 수록곡중 박진하 작곡의 <애원> <그대가 떠난후> <바람의 거리>와 서정길 작곡의 <빗소리>등 4곡을 부르며 발매한 데뷔앨범 <애원-성음,DG-가12,70년1월>의 반응은 뜨거웠다.

순식간에 8만장이 팔려나가고 재판까지 발매됐다. 데뷔앨범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물게 1곡을 제외하곤 모두 창작곡들로 구성되어 더욱 주목 받았다. 예상치못한 빅히트에 대지레코드 정사장은 몸이 후끈달아 올랐다.

우미회관 연예부장 엄진과 이길봉이 작곡한 3곡을 추가해 10곡이 수록된 2집 <누구일까?-성음,DG가33,71년5월>도 연이어 발표했다.

일간스포츠가 창간되면서 크게 소개가 되고 TV, 라디오 방송출연요청도 들어왔다. 종로,명동등 음악다방에는 <애원>음반이 필수소장품일 만큼 신청이 밀려들었다.

황규현은 '스스로 음반을 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감격에 겨워 하룻밤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의 심정을 전해준다.

<애원>은 80년대 중고등학생들 사이에까지 '목이메여 불러본다 지금은 연습이야'로 개사되어 불리어질 만큼 10여년이상 끊임없이 불리어진 공전의 히트곡. 일순간 찾아든 인기의 전율은 짜릿했지만 지속적인 인기유지를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독집음반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30만원만 있으면 나훈아를 능가하겠다"고 설득했지만 보수적인 부친은 "군에나 가라"며 냉담했다. '좌절감에 온통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왔다'는 황규현.

"당시도 홍보비 없이는 인기유지가 불가능했다"며 가수들의 치유되지 않는 뿌리깊은 상처를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인기의 열풍속에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봤다. 73년 2기 5인조 플레이보이를 결성, 유명고고클럽인 닐바나에서 그룹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조선호텔 투머로 나이트클럽, 국제호텔, 라이온스등에서 생계를 위한 소모적 음악활동으로 일관했다.

그 뒤 황규현과 VIP'S를 결성, 13년만인 84년에 3집 <황규현과 수레바퀴-오아시스,OL2579,84년3월>음반을 발표했다.

이때는 외국이름으로 음반을 발표할수 없어 윤회사상에 입각해 황규현과 수레바퀴로 그룹명을 변경했다. 불음곡 석가모니를 타이틀곡으로 발표한 11곡중 <거기 아무도 없소>가 히트를 했지만 본인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음반이다.

주간중앙 서병후기자의 도움으로 86년엔 4집을 89년엔 민영후란 예명으로 5집 를 발표하며 <애원>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였지만 늘 넉넉치 못한 재정으로 좌절해야만 했다.

요즘 압구정동에 이라는 재즈카페를 운영하며 자신을 기억해주는 팬들과 교감하는 황규현.

'40대이상이 공감할수 있는 트로트록을 꼭 해보고 싶다'며 식지않는 음악적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뒤늦게 삶의 체험이 녹아든 편안한 창작음악에 대한 갈증에 목이타는 황규현의 모습은 음악적탐구보다는 인기만을 쫒아 단명하는 요즘 후배가수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3/0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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