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낡은 정치의 망령, 색깔론

한국정치를 움직여 나가는 힘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색깔론과 지역감정은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할 부정적 요소이다.

특히 가장 큰 정치적 행사인 선거는 이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결과를 결정짓다시피 했다. 평소에는 색깔론이나 지역감정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던 정치가나 국민들도 선거를 맞이해서는 최면술에 걸린 듯이 여기에 빠져들었다.

국민의 합리적인 선택이라든가 건전한 정책 경쟁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론일 뿐 현실정치에서는 발붙일 여지가 없었다.

최근의 우리 정치에서 다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색깔론은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경선을 치르면서 폭풍을 몰고 온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음모론 공세가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색깔론이 등장한 것이다.

색깔론의 가장 큰 피해자인 민주당에서 색깔론이 제기되는 것은 정치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불을 붙였다. 이회창 전 총재가 대통령 경선에 출마하면서 국민의 정부를 '좌파적 정권'으로, 노무현 후보를 '급진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색깔론이 한국정치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50년이 넘는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적색혐오증이 만연되었기 때문이다. 레드 콤플렉스(red-complex)에 기대어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바로 색깔론이었다.

정치 경쟁자를 그냥 탄압하면 국민이 탄압 받는 정치인을 동정하기 때문에 탄압의 효과가 없다. 오히려 탄압 받는 정치인의 지지가 올라가곤 했다. 그런데 색깔론은 국민의 동정심을 차단하면서 효율적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재자들이 애용해왔다.

대표적인 색깔론의 피해자가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이다. 그밖에 현역 정치인으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근태 민주당 고문 등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고,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색깔론의 약발이 다 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에서는 민주당을 '북한 노동당의 2중대'라고 몰아 부치고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일련의 개혁을 엉뚱하게 '사회주의'라고 비난하는 등 색깔론 공세를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에 기대어 일부 언론도 색깔론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그러다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남북관계가 침체에 빠지면서 색깔론이 되살아 났다.

아직까지는 큰 위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색깔론은 집단적 광기의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색깔론은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가까스로 되살아 난 정치를 다시 국민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지도 모른다. 색깔론을 제기한 측에서는 이념 논쟁이라고 주장한다. 이념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제기된 색깔론은 이념 논쟁이 아니다. 올바른 이념 논쟁은 각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정책을 놓고 벌여야 한다.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수상쩍다는 낙인을 찍는 지금의 이념 논쟁은 '야만적이고 광적인 정치공세'에 지나지 않는다. 수상쩍다고 하는 근거, 다시 말하면 색깔론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주로 개혁을 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바꾸자는 주장만 하면 모두 수상한 색깔로 몰아버린 것이다. 개혁을 반대할 수 없으니까 색깔을 덧씌워 반대하는 셈이다.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버려야 할 낡은 정치의 망령인 색깔론이 확산되는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있다.

후보들의 주장을 사실 여부나 중요성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실어주는 잘못된 보도 관행이 문제인 것이다. 아니 색깔론을 신봉하는 일부 언론이 정치인들의 입을 빌어서 자기 신문의 색깔을 유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론은 특정 후보의 선거전술에 장단을 맞추지 말고 정책대결을 선도하는 제 구실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손혁재 시사평론가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입력시간 2002/04/0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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