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 펀치] "한 게임하고 팬티바꿔입었지"

내가 살고있는 아파트 옆에 작은 운동장이 있다. 운동장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미안할 정도로 작은 공터에 불과한 곳이지만 얇게 모래가 깔려있는 이곳에서 아이들이나 동네 남자들은 나름대로 운동을 즐길 수 있다.

은퇴를 한 노부부가 사이좋게 배드민턴을 치거나 서너 명의 아이들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 절대로 홈런이 나올 수 없는 소박한 야구게임을 치르기도 한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이곳은 작은 운동장이 아니라 북적거리는 축구경기장으로 바뀌었다.

큰놈들이건 작은 놈들이건 서로 연령에 맞게 편을 갈라 축구를 하느라 가뜩이나 길어진 하루 해가 깜깜해지도록 함성이 들려온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뒹굴며 공 하나를 가지고 골인이네 아니네 하며 다투는 소리가 어둑어둑해지도록 멈추지않는다.

멋진 글러브와 진짜 야구공을 가지고 으스대던 놈들이 어느새 축구공을 들고는 아주 간단하게 이력을 바꾸는 일도 다반사다.

10살 먹은 내 아들녀석도 가죽으로 만든 야구 글러브를 가지고 끼고 살더니 얼마전에는 자기 용돈으로 축구공을 하나 사서는 허구헌날 차댄단다. 애 엄마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서 돌아오면 신발도 못벗고 가방만 던져둔 채 축구공을 들고 뛰어나갔다가 잠시 저녁을 먹으로 집에 들르고는(?) 다시 축구공을 들고 나가 날이 깜깜해져서야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들어온단다.

그 녀석에게 축구의 경기규칙이며 갖가지 현란한 기술같은 것은 아예 관심 밖이다. 아들녀석은 오로지 발로 공을 차고 뛰다가 운좋게 한골 넣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온통 축구경기뿐이라 TV 볼 마음이 없다던 아줌마들의 입에서 우리나라 선수들 이력은 물론이고 베컴이니 피구니 지단이니 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만들고, 만화영화 시간을 놓치면 온세상의 기쁨을 잃은 것처럼 풀이 죽던 아이들을 흙투성이가 되도록 공과 뒹굴게 만드는 힘, 바로 전세계를 하나되게 만드는 월드컵의 힘이다.

평소에 점잖은 분이라고 생각했던 선배 한분이 빨간색의 붉은 악마 유니폼을 입고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할 정도다. 가뜩이나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 문제거리가 되고 있는 판국인데 월드컵의 열기 때문에 지구가 뜨겁다 못해 폭발이라도 하는건 아닌지 사소한 걱정도 든다.

연예인들 중에서도 열혈 축구광들이 있다. 최수종이나 김흥국은 전국민이 다 알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는 연예인들인데,나와 친한 연예인 A군도 이들의 축구사랑에 비교해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A군이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냐 하면 우리나라가 폴란드와 싸워 월드컵 사상 첫 번째 승리를 이끌어냈던 감격의 그날 불운하게도 촬영이 겹치던 날이었다. 며칠전부터 스케줄을 조종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한숨을 푹푹 쉬며 심각하게 말했다.

"내가 부산까지 못가는건 그렇다고 쳐. 헌데 역사적인 그 순간을 재방송으로 봐야해? 아, 미치겠다."

"우리나라가 질지도 모르잖아."

"형, 밖에서 그런 소리 했다가 맞아죽는 수가 있어. 축구냐, 촬영이냐, 그게 문제로다. 확 방송을 접고 축구를 볼까?"

축구경기를 보려고 방송까지 그만두겠다는 A군을 간신히(?) 말려놓은 며칠 후였다.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사우나에 가서 휴식을 취하려고 나오다가 A를 만났다. A 역시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마침 A도 사우나에 가던 길이라길래 나란히 사우나에 들어갔다.

"너도 고생이다. 하루종일 촬영하고 밤새도록 축구 보고, 잠도 못잤구나. 얼굴이 말이 아니야."

하면서 옷을 벗는데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A가 여자팬티를, 그것도 레이스와 망사로 된 이보다 더 야할 수는 없다라고 할 수준의 여자팬티를 입고 있는게 아닌가.

"아, 깜빡했네. 나 어제 한게임(?) 치뤘거든. 형, 그거 알지? 축구경기 끝나면 상대편 선수들이 서로 유니폼 바꿔입잖아. 그래서 나도 유니폼(?) 바꿔입은건데.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 낀다 싶었지. "

A보다 더 열렬한 축구광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입력시간 2002/06/1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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