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이정선(上)

노래를 '이야기'한 컬러리스트

자연과 사람을 소재로 한 ‘섬소년’, ‘구름ㆍ들꽃ㆍ돌ㆍ여인’, ‘뭉게구름’등 아름다운 포크 송들과 가톨릭회관 ‘해바라기’노래 공연을 진두지휘하며 1970년대 청년 문화의 흐름을 주도했던 포크가수 이정선.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신촌 블루스’ 활동을 통해 이 땅에 본격적인 일렉트릭 블루스를 도입하며 포크와 더불어 록과 블루스를 넘나들며 자기 색깔이 뚜렷한 소리여행을 계속해오는 진지한 대중 음악가이다.

그는 작ㆍ편곡가이자 트럼본 연주가로 유명했던 부친 남방춘(본명 이재홍)과 모친 이갑세의 4남 1녀 중 3남으로 1950년 9월20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작은 이모부 이재춘도 연주분과위원장을 역임한 음악가 집안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의 음악활동을 반대했던 아버님과 음악을 듣기조차 싫어했던 어머니 때문에 음악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상무대 군악대장이던 부친의 근무지에 따라 고향 대구를 떠나 여수, 광주 등 지방과 더불어 6살 때 서울로 올라와서도 용두동, 교동, 청계천, 충무로 4가 등으로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만5세 때 생일을 속이고 방산초등학교에 조기 입학한 어린 이정선은 남들 앞에서 노래할만한 숫기가 없어 음치로 통했다.

중학교는 3차로 동북중에 간신히 입학했다. 미술대회에 나가 입상을 여러 차례 했지만 공부가 시원치 않던 아들에게 육사 군악대장이 된 부친은 중2 때는 검정고시를 치게 하고 이화여대생 가정교사를 붙여주는 등 아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었다.

팝송을 좋아했던 여대생 가정교사는 음악 메신저였다. 어느 날 집에 음반이 있던 ‘Are you lonesome tonight’의 팝송 가사가 학교 영어신문에 실리자 신기함을 느끼며 팝송을 배웠다.

용산고에 진학하면서 전오승의 ‘기타교본’을 보고 기타 독학을 시작했지만 부친은 기타를 3대나 부셨을 만큼 음악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타고난 청개구리 성격의 이정선은 부친의 반대가 거세질수록 더욱 기타를 배우고 싶어 동네 만화가게에 기타를 숨겨놓고 배웠다.

또한 AFKN을 통해 다양한 팝송을 접하면서 당시 학교정문 앞에 있던 미군 상대의 해적판가게에서 음반을 구해 들었다. 기타 실력이 늘자 소풍 때는 거의 독무대를 이뤘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이정선은 “내 짝과 전방 순회 공연을 가서 벤쳐스 흉내를 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고2때 진학 적성검사에서 평균 95점을 받았지만 상업부기와 미술은 80점도 나오지 않자 오기로 미술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수험공부를 했다. 1968년 1순위로 지원했던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에 떨어져 2 순위였던 조소과에 들어갔다.

대학 신입생 이정선은 벤쳐스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2학년 때 쓰리 핑거 주법으로 기타를 잘치는 김민기가 신입생으로 들어오자 코드도 가르쳐 주고 함께 어울렸다. 2학년 1학기 마치고 부친의 도움으로 군악대로 입대를 해 수자폰, 베이스, 첼로 등을 배우고 편곡된 합주 악보를 맡으면서 편곡의 세계에 눈을 떴다.

그는 군악대 생활을 통해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노래 등의 음반제작 전 과정을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음악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1969년 말 휴가를 나오자 김민기는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70년 YMCA강당에서 최경식이 개최한 제1회 포크 페스티벌에 김민기의 도비두, 서울음대의 김광희와 함께 이정선은 베이스를 치며 참가해 ‘피터폴 앤 매리’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정선은 “1971년 말 제대를 앞두고 외출을 나왔는데 김민기 독집이 음반가게에 있어 반가운 마음에 구입해 들었다. 1969년 남산 드라마 센터에서 본격적인 한국 포크의 탄생을 알리는 한대수의 아방가르드 공연을 보고 받은 충격을 다시 느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곡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때부터 습작처럼 많은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놓는다.

군에 있는 동안 부친의 사업이 망해 버렸다. 제대 후 취직하려 했지만 힘들었다. 당시는 통기타 전성시대. 음악을 해볼까 하여 들린 방송국에서 우연히 김진성 PD를 만나게 되어 기타를 치게 되었다.

이때 평론가 최경식과 교류하면서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 이정선은 “나는 노래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생각이다.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노래는 메시지 전달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자신의 음악관을 밝힌다.

그는 가수보다는 이용복, 영씨스터즈 등에게 가사를 번안해주고 편곡,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김진성이 소개해준 김혜원이라는 친구와 함께 녹음한 노래를 들은 최경식이 1973년 2월 명동 YMCA에서 ‘이정선 노래 발표회’를 열어 주었다. 이정선은 “많은 포크 가수들을 섭외 했는데 어니언스만 왔다. 악보를 받고도 가수들은 악보를 언제 주었냐고 발뺌하는 등 아무도 내 곡을 불러주지 않아 오기가 솟아 열심히 노래연습을 했다”고 말한다. 이 무대는 가수 이정선의 공식적인 데뷔 무대였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8/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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