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어른들을 위한 동화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동화를 통해 꿈과 모험과 상상의 세계로 빠져든 경험이 있을 듯 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굳어지기 전이기에 동화 속 상상의 세계에서 울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는 유치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꿈이 사라진 자리에 팍팍한 현실이 자리잡고, 세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다. ‘꿈이여 다시 한번’이라는 노래도 있지만 꿈을 다시 살려 볼 길은 없을까? 책 속에 그 길이 있다.

  • TV동화 행복한 세상
  • 아름다운 이야기는 자주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샘터)이 그렇다. TV를 통해 사랑 받아온 내용이 책으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왜 일까.

    따뜻한 할머니 손질처럼,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올린 어린시절 기억처럼, 마치 나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포근한 마음으로 가을을 지내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곁에 둘 만한 이야기가 담겼다.

  • 어른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전집
  • 동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바로 안데르센이다. 그의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인어공주’ 같은 이야기들은 전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가장 친숙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다른 동화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린 시절 접한 안데르센 동화 역시 원작의 상당 부분을 삭제하거나 줄인 것들이다. 삭제하거나 줄이지 않은 원작 ‘인어공주’는 다음과 같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공주는 바다로 뛰어내려 물거품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공기의 정령이 되어 인간의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300년 동안 착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인어공주의 정령은 인간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

    안데르센은 어떻게 결말짓고 있을까? 300년 기간 중에 인어공주가 착한 아이를 한 명 발견하면 1년씩 기간이 단축되고, 나쁜 아이를 한 명 발견할 때마다 1년이 연장된다. 안데르센의 다른 이야기들도 궁금하다면 <어른을 위한 안데르센 동화전집>(현대지성사)를 읽어 볼 일이다.

  • 환상동화집
  • 위의 책이 어린 시절 이미 접했던 동화의 본래 모습을 즐길 기회라면, 동화 작가가 아닌 작가가 쓴 동화를 접할 기회도 있다.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헤르만 헤세가 쓴 동화라면 어떨까? 헤세가 동화 형식으로 쓴 단편 및 중편 스물 여섯 편을 모은 책으로 <환상동화집>(민음사)이 있다.

    헤세 연구자 풀커 미헬스가 편집하여 <동화>(Marchen)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동화라기보다는 우화나 환상문학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도시’라는 제목의 작품을 보면 이렇다.

    한 엔지니어가 작은 마을 기차역에 내리며 ‘발전해 가는구나!’라고 말한다. 그 작은 마을은 큰 도시로 발전해 나간 끝에 수도가 되고 절정기를 맞이하지만, 계급 갈등에 따른 유혈 혁명으로 몰락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도시는 완전히 황폐화되지 않고 처음의 아름답고 깨끗했던 작은 마을로 되돌아간다. 동물들이 돌아오고 숲이 무성해진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한가롭게 나무를 쪼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발전해 가는구나!’

  •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
  • 프랑스에서 국민 작가로까지 칭송 받는 마르셀 에메(1902-67)가 ‘네 살부터 일흔 다섯 살까지를 위해 쓴 동화’로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작가정신)가 있다. 세 권으로 나뉘어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어린 자매 엘핀과 마리네트, 그리고 고양이, 암소, 당나귀, 돼지 등이 모여 사는 농가에서 벌어지는 17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작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갖고 싶어하는 돼지가 있다. 물과 풀만 먹는 다이어트를 시도한 끝에 핼쑥해진 돼지는 자신의 꼬리에 공작 날개가 생겼다고 믿는다. 농장의 다른 모든 동물들이 돼지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겨운 다이어트를 계속한다.

    이쯤 되면 작가가 돼지를 어리석다고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 항아리
  • 이제 우리나라 작가들을 만날 차례다.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등의 시집을 통해 특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시인 정호승이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집으로 <항아리>(열림원)가 있다.

    표제작 ‘항아리’를 포함해 열 여섯 편의 짧은 동화가 실려 있는데, ‘항아리’를 보면 이렇다. 오줌통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던 항아리는 봄이 되자 배추들이 싱싱하게 자랄 수 있도록 오줌을 뿌려주게 되어 기뻐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어느 절 종각의 종 밑에 묻힌다. 종이 울릴 때마다 소리를 받아내면서 항아리는 이렇게 말한다.

    “고요히 산사에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요즘 나의 영혼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범종의 음관 역할을 함으로써 보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내 존재의 의미이자 가치였습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줄거리도 줄거리지만 문장 하나 하나가 주는 감동이 만만치 않다. 글과 훌륭하게 어울리는 박항률 씨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 하얀사랑
  • 한편 작년 1월에 세상을 떠난 작가 정채봉을 빼놓고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 성인 동화 장르의 개척자로도 평가받는 정채봉이 병상에서 손수 제목을 짓고 완성된 책을 받아 본 마지막 책으로 <하얀 사랑>(샘터사)이 있다. 97년에 포켓판으로 발간된 것을 판형을 바꿔 재출간한 것이다.

    머릿글을 대신한 ‘입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는 마음 속 사랑의 말을 간직한 채 죽어간 어린 소녀 송자의 순수한 사랑을 잔잔하게 그린다.

    가장 아끼고 싶은 말, 한번만 하고 영원히 숨겨 두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는 선생님의 말에, 손을 들고 영석이에게 “사랑해”라고 귓속말을 한 송자. 그런데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냐고 다그치자 영석이가 실토하고 만다. 아이들이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며 “와”하고 소리치는 순간, 선생님은 들고 있던 대나무자로 송자의 입을 때린다. 그때부터 송자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꿈, 모험, 상상의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한없이 슬픈 이야기도 있고 잔잔히 미소짓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신랄한 풍자도 있고 삶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드는 진지함도 있다.

    그러니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어릴 적 꿈을 되살려주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 말자. 바로 지금 여기의 나 자신이 꿀 수 있는 새로운 꿈. 그런 꿈을 북돋워줄 수 있으니 말이다.

    표정훈 출판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9/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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