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 부자들의 돈 굴리기

투자처 못찾는 '큰돈·큰손'… 그들만의 재테크 비법과 부자의조건

가을 햇살이 유난히 눈부신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스타타워 빌딩. 이제 막 출고된 듯한 1억5,950만원(부가세 포함) 상당의 은색 BMW745 세단 한 대가 천천히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CHB PRIVATE BANKING VIP PARKING’이라고 쓰인 ‘아주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주차공간에 승용차가 멈추고 ‘4말5초’ (40대 말~50대 초반)의 중년여성이 운전석에서 내려선다.

명품 페레가모 구두에 로베르타 선글라스, 미소니 반팔 T셔츠, 에르메스 숄, 프라다 핸드백¼ 엘리베이터로 다가가는 그의 뒷모습에선 ‘강남 귀부인’의 자태가 묻어난다.


부자들은 그곳으로 간다

특허법 관련 소송 분야에서 첫손에 꼽히는 J법무법인 대표의 ‘사모님’ 김(52)모씨. 그녀는 헬스클럽으로 아침 운동을 가기 전에 자신의 돈을 운영해주는 은행의 프라이빗 뱅킹(PBㆍ거액자산 관리서비스) 센터를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들른다.

지난달 26일이 바로 그날이었다. 김씨는 원래 시중은행 한 곳과 증권사 등 모두 3군데의 금융기관과 거래를 해왔다.

그런데 최근 서울 강남의 한 복판에 문을 연 모 은행의 PB센터가 강남 부유층 사이에서 ‘가장 확실한 곳’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반 호기심으로 계좌를 열었다. 그녀의 관심을 자극한 것은 이 PB센터의 매니저들이 유명 외국계 은행에서 연봉 1억원 이상을 보장 받고 전격적으로 스카우트됐다는 점이다.

이 PB센터는 지난달 9일 문을 열었는데, 고객 수는 김씨를 포함해 75명쯤 된다. 개점 20일이 지났지만 고객을 100명도 채우지 못한 것은 다른 PB센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수탁고를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고객들로부터 맡은 자산(돈)이 1,000억원을 넘어섰다는 사실은 고객 1인당 예치금 규모가 최소 10억원 이상이라는 말이다. 그제서야 입구부터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치장한 이 PB센터의 문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김씨가 매일 아침 강남 대치동의 아파트에서 서초동 J.W.메리어트 호텔 헬스클럽 (입회비 3,800만원+연회비 165만원)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승용차로 꼭 20분. ‘투자자의 운전 속도를 보면 그 투자 성향을 읽을 수 있다’는 증권가 속설처럼 김씨는 ‘BMW 오너드라이버’이지만 결코 시속 60Km를 넘게 액설레이터를 밟지 않는다. 재산 보전ㆍ증식을 위한 그녀의 투자전략도 보수ㆍ안정적이라는 방증이다.

최근 국세청의 부동산 투기세무조사 여파와 증시 침체, 콜금리 상향 조정 임박설 등 투자 심리가 위축되면서 300조원에 달하는 유동자금이 투자처를 찾아 떠돌고 있지만 그녀의 재테크관은 분명하다.

연말 대선과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에 따른 유가 급등, 달러화 강세 등 증시의 데이트레이더나 일반 투자가들에겐 치명적인 요인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돈의 규모가 다르고 굴리는 방법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씨의 주거래 PB센터 고객 중에서 주식투자나 저축 등을 통해 부자가 된 사람은 정보통신(IT) 활황기에 일어선 벤처기업인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곳을 찾는 ‘부자’들은 재산축적 방법으로 부동산 투자와 유산 상속, 돈을 많이 버는 고액 연봉 전문직업 종사자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한 PB 관계자는 “강남에 거주하는 이곳 고객들은 평균 금융자산이 30억원 이상으로 두서너 곳의 금융기관에 분산, 예치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그러나 금융자산 보다 부동산 등 고정자산은 4,5배나 더 많은 ‘부동산 알짜 부자’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돈 얼마나 있나?

시중에 돈이 흘러 넘치는 요즘, 과연 PB센터를 이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춰야 할까?

또 ‘부자’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경영컨설팅 업체인 KMC 디지털 경영연구소가 최근 거액 금융자산 고객들의 자산관리를 맡고 있는 국내 금융기관 PB 매니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부자’의 기준은 일반적으로 연간 소득 1억원 이상으로 ‘금융자산 10억원 이상 보유자’로 인식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세계적인 경제전문지 포브스 등이 꼽는 연간 소득 10만 달러 이상, 금융자산 50만 달러 이상으로 분류하는 미국의 ‘부자(Riches)’ 기준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금융자산이 10억원이면 은행신탁배당률을 연 7%로 적용할 경우 연 7,000만원의 이자소득이 생기고, 이 것만으로도 ‘잘 사는 사람 10%’(연 소득 7,200만원 이상)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 정도 ‘부자’는 얼마나 될까. 미국의 유수 경영컨설팅 업체인 보스톤컨설팅(BCG)이 최근 국세청의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말 현재 국내에서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의 부자’는 5만2,000여 가구(잠정)로, 이들이 보유한 금융 자산 총액은 약 165조원으로 추정됐다.

이는 우리나라의 2003년 예산 111조7,000억원보다 50조원 이상 많은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개인 금융자산 총액(약 850조원)의 10%에 해당한다. 이들의 금융자산은 앞으로도 매년 9.7%씩 늘어나 2005년에는 약 290조원에 달할 것으로 BCG는 관측했다.

부자들의 금융자산이 매년 9.5%씩 늘어나려면 그들만의 재테크는 뭔가 특별하지 않을까? 자산관리의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보자.

불행하게도 이들의 재테크를 한마디로 정의할 만한 것은 없다. 나이와 직종은 물론 개인 투자성향, 재산 보존ㆍ증식 목표 설정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하나경제연구소의 개인금융 시장에 대한 연구자료에 따르면 이들 ‘부자’의 주식ㆍ채권 등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 비중은 지난해 말 현재 개인별 총 자산 포트폴리오의 평균 18% 수준으로, 점차 금융상품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재산이 100억원 규모일 경우 부동산과 예금, 현금 자산 등이 약 82억원에 이르고 18억원 정도만 주식과 채권시장에 굴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또 주식형 상품에서도 실세금리보다 다소 낮더라도 안정적 금리를 주는 상품이거나 리스크가 있어도 원금보전이 될 정도로 실세금리 플러스(+) 알파 상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고 한다.

박경제 조흥은행 PB 파이낸셜 어드바이저는 “미국 부유층의 금융자산 포트폴리오에서 예금 및 현금 비중은 12%이지만 한국의 부유층은 53%에 달한다”며 “반대로 주식ㆍ채권에서는 미국이 35%인 반면, 한국은 아직까지 18%에 불과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인응 우리은행 PB팀장도 “부자 고객들의 80%는 보수적 투자성향을 갖고 있어 금융 자산 중 주식형 상품은 많아야 20%”라며 “이들은 정기예금 금리보다 다소 높은 수익만을 기대할 뿐 ‘대박’을 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귀띔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부자들은 대체로 주식ㆍ채권을 사는 ‘투자’형 보다는 현금을 부동산에 묻어두거나 금융기관에 맡기는 ‘보관’형이 많다는 이야기다.


재테크 비법은?

김씨는 PB센터에 갔다 왔지만 아직 ‘최대 고민’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다른 금융기관에서 만기가 돼 찾은 현금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PB센터의 파이낸셜 어드바이저의 소개에 따라 은행, 증권, 부동산 전문 PB 담당자들을 만나 이것 저것 상담을 했지만 이렇다 할 만큼 확신이 드는 곳이 없다.

주식형에 가입하자니 증시가 최근 해외변수 등 안팎의 불안감으로 하향 조정의 흐름을 쉬 탈피할 것 같지 않고, 부동산은 정부의 강경대책으로 묶일 판이다. 또 아무리 안전하다지만 은행예금은 수익률이 너무 낮아 불만이다.

가계대출의 증가와 부동산 거품에 대해 정부 당국의 정책이 어떤 식으로 나설 지 몰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도 내키지 않는다.

PB센터의 파이낸셜 컨설턴트는 김씨가 50대 초반임을 고려해 우선적으로 자녀들에 대한 증여ㆍ상속 문제를 염두에 둔 장기 투자를 조언했다.

컨설턴트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강남지역에서 한 차례 더 집값 상승 가능성이 높아 환금성이 뛰어난 아파트 투자나 기준시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수십 억원대 건물 혹은 골프연습장을 자녀이름으로 구입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했다.

‘부동산 불패’ 신화를 믿는 투자 방식이다. 내년에 들어설 새 정부가 조직을 정비하기 전까지는 세무당국이 적극적으로 단속에 나서기 어렵다는 점과 어차피 자녀들에게 상속할 바에는 ‘권력 이동’의 시기적 틈새를 공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근거로 내세웠다.

여기에 가계대출 상품을 이용해 증여세를 대체하는 아이디어는 물론 자녀들이 성장하기까지 건물을 임대 관리해줄 부동산 투자신탁상품까지 제시했다. 부동산 투자 신탁상품의 배당률은 최근 금융감독원 발표에 따르면 최저 6.1%에서 최고 12.3%로 높은 수익률을 보이고 있다.

부자들은 또 합법적으로 ‘세금 덜 내는 것’을 ‘더 버는 것’보다 중요한 재테크의 룰로 여긴다. 그래서 금융상품으로는 분리과세 혜택이 주어지는 세금우대저축, 신협의 정기예ㆍ적금, 7년제 비과세 저축성 보험, 금융소득종합과세 적용을 받지 않는 비과세 저축형 연금상품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특히 장모 전 총리서리가 사전 상속의 한 방식으로 활용해 관심을 끌었던 특정 생명보험 상품도 이용되고, 비과세 해외발행 채권 중에는 1998년 12월31일 이전 발행한 국내 우량기업 해외발행 채권에 돈이 넣는다. 비상장 우량주식, 비실명 장기채권 등도 부자들에겐 좋은 투자거리다.

부부간에 재산을 분할하는 방법도 부자들에겐 최근의 관심사다. 이자ㆍ배당소득, 임대소득 등에 대한 부부합산 과세가 위헌결정이 내려져 정부가 내년부터 부부간 증여세 면제 기준을 5억원에서 3억원을 인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예금자 보호법 한도내에서 제2금융권에 부부명의로 돈을 분산 예치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확정금리 금융상품에 대한 부자들의 관심도 높다. 오희열 삼성증권 웰쓰 매니지먼트 기획팀장은 최근같이 불확실한 시장 상황에서는 확정금리형 상품을 활용하는 것을 권한다.

오 팀장은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현재 금리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3개월단위의 예금이나 채권형 상품을 선호하지만 이보다는 1년 만기 상품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현재 3개월 은행 예금금리가 4.5%내외이고 은행 1년 정기예금금리가 5.1% 내외인데 최초 3개월 예금가입 후 3개월 단위로 금리가 인상되는 예금으로 연장하더라도 9개월동안 3개월 예금 평균 금리가 5.2%가 넘지 못하면 1년 만기 예금의 수익이 더욱 양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2/10/04 15:14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