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6개월은 악몽의 세월이었다"

한과 눈물로 산 개구리소년 부모들, 가정도 풍비박산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만 같아서 밤마다 문을 열어 놓고 지금까지 전화벨만 울리면 혹시나 하며 달려가 받았는데….”

도롱뇽 알을 주으러 간다며 집을 나간 대구 성서초등학교 우철원(당시 13세) 조호연(12) 김영규(11) 박찬인(10) 김종식(9)군 등 5명의 어린이들은 정확히 11년6개월만인 9월26일 한 조각 유골이 돼 돌아왔다. 집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기슭 웅덩이의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가늘고 여린 유골이 서로 뒤엉킨 모습으로 발견 된 것.

때로는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디선가 살아 있다가 불쑥 ‘엄마’ 하고 외치며 대문으로 걸어 들어올 것을 기대했던 다섯 어린이의 부모들은 망연자실했다.

경찰로부터, 언론보도를 보고 현장으로 달려온 개구리 소년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신발과 옷가지들을 일일이 확인하고는 피맺힌 오열을 터뜨렸다.


생업 포기한 채 전국 헤매

개구리 소년 부모들의 지난 11년 반은 한과 눈물의 세월이었다. 생업을 포기한 채 자식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맸고 몇몇 가정은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기도 했다.

종식군의 어머니 허도선(47)씨는 “종식이가 집을 나간 뒤 11년6개월은 악몽의 세월이었다”며 울먹였다. 다섯 가족은 종식이 집 전화를 혹시 아이들의 행방을 알려줄 대표 신고 전화로 해 놓고 생업을 팽개치고 아이들 찾기에 나섰다.

번갈아 가며 1명은 항상 전화 앞에 대기를 하고 나머지 아버지들은 지난해 10월 작고한 종식이 아버지 김철규씨가 모는 1톤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볐다. 트럭 옆에 아이들의 대형사진을 걸고 확성기로 종식아, 호연아, 영규야 목메어 불렀다.

허씨는 “매일 아침 우리 집에 모여 트럭에 올라 타고 전국 곳곳 안 가본 곳이 없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나 역은 물론 강원도 산골짜기와 섬까지 찾았다. 부모들은 추운 겨울날에는 아이들의 두툼한 겨울 옷을 챙겨 트럭에 실었고, 여름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반소매를 준비했다.

그렇게 생업을 포기하고 돌아 다니길 3년여. 농사를 짓거나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온 집안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3년간 다섯 가족이 쓴 경비만 2억여원. 각계 성금과 예금통장도 깼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허씨는 “일을 못하니 수입이 없고 3년간 돈을 쓰기만 했는데 집안이 어떻게 되겠어요?. 어떤 때는 전기, 수도 요금과 의료보험도 제때 못 냈습니다. 형편만 되면야 10년, 100년이라도 계속 찾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찾는 일은 경찰에 맡기고 생활전선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고 울먹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잊을 만 하면 걸려오는 허위 또는 오인 제보 전화들. 실종 한달쯤 뒤에 종식이를 보호하고 있으니 거액을 준비하라는 전화가 걸려왔고 석달 뒤에는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장난전화로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특히 가족들은 괴롭힌 것은 피해자를 가해자처럼 본 일각의 시각과 엉터리 신고들이다. 당시 주변에서는 종식이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라는 루머가 나돌았고 급기야 96년 1월에는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라는 김모씨가 종식이 집에 아이들이 암매장돼 있다고 주장했다. 종식이 아버지가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아이들을 살해한 뒤 부엌 옆 방바닥에 묻고 시멘트를 발랐다는 것.


엉터리 신고에 상처

어이없어 하던 철규씨는 누명을 벗기 위해 원상복구 약속을 받고 경찰의 수색에 동의했다. 경찰은 굴삭기까지 동원해서 부엌과 안방, 화장실까지 파 헤쳤지만 유해가 나올 리 만무했다.

허씨는 “종식이 아버지는 학교 다닐 때 유도선수를 할 정도로 건강체질이었고 술 담배도 전혀 안 했다”며 “종식이가 그렇게 되고 나서 한 두잔으로 시작한 술이 늘었고 결국 지난해 초 간암판정을 받았고 10월에 아들의 생사도 모른 채 눈을 감아야만 했다”고 눈물을 쏟았다.

매달 300만원이 넘는 치료비 때문에 택지개발에 따른 보상금도 거의 다 날렸고 허씨는 생계를 위해 인근 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외아들인 종식이의 생사가 불투명해지자 그녀는 늦둥이를 가졌고 94년에 종식이 동생 종엽이를 얻었다.

그녀는 “종엽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종식이 얘기는 그 동안 숨겼다”며 “이번에 유골이 발굴되고 나서 종엽이가 ‘개구리 소년이 머예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 설움이 복받쳤다”고 흐느꼈다.

종식이 누나 김순옥(23ㆍ계명대 3년)씨도 “학교를 졸업하면 실종 어린이들을 찾는 경찰이 되려고 했는데 종식이가 죽은 것이 확인돼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떨궜다.

찬인이 집안도 가정이 풍비박산 나기는 종식이네와 마찬가지다.

아버지 박건서(48)씨는 아들이 실종된 후 다른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술이 늘었고 결국 정도가 지나쳐 정신적 공황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주변의 말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박씨는 얼마 전에도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술을 먹다 경찰을 폭행, 공무집행방해로 구속돼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들의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현장에도 올 수가 없었다.

죽기 전에 손자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면 편히 눈을 감겠다던 할머니 김말복(77)씨는 가슴에 맺힌 한을 못 삭인 채 병상에 누워 있는데,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우려해 손자의 유골 발견 소식마저 전하지 못하고 있다.

허씨는 “30년 만에 부활된 기초의원선거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원망도 많이 했다”며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채 잃어 버리고, 죽게 한 것은 부모의 죄”라고 자책해 주위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대구=정광진 기자

입력시간 2002/10/04 15:55


대구=정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