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세동 전 안기부 대선 출마 선언

"국민통합·통일 위해 밀알 되겠다"

"국민통합을 위해 내 갈 길을 가겠다"

80년대의 풍운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10월21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장전부장은 공식 선언 하루 전인 20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주간한국과 첫 공식 인터뷰를 갖고 "지역과 이념, 계층과 세대간 분열과 반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용서와 화해가 바탕이 되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기 위해 대선전에 뛰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는 속담을 인용, "국가 전체가 서로 상투잡이의 극한 대결을 벌이고 있어 화합을 기반으로 통일로 가기 위한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나서게 됐다"고 국민통합과 동서화해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그는 지금의 대선구도속에 당선이 가능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는 "통상적인 정치관행으로 보면 무모한 도전인 게 사실"이라고 열세를 인정한 뒤 "하지만 (선거란) 국민이 심판하는 것이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느냐는 질문에는 "여러가지로 염려를 하시더라. 내가 결례를 했다"고 전 전대통령은 사실상 반대했다는 뜻을 내비쳤다.


새 시대에 맞는 선거유형 만들겠다


- 어려운 상황에서 뒤늦게 대선전에 뛰어 들었는데.

"조직도 없고 선거자금도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른다는 게 기본 관생상으로는 이해될 수 없지요. 하지만 국민에게는 지금 무언가 변화해야 한다는 욕구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단기필마로 조직도 없이 빈 손으로 출마 결심을 했습니다.

돈 안드는 선거를 희망해 온 국민에게 선거혁명의 본보기를 보이는 한편, 정당정치·지역정치·금권정치의 폐해를 뛰어 넘는 새 시대 선거샘플을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본인의 출마가) 나름대로의 상징적 의미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봅니다"


- 대선 출마를 둘러싸고 회의적인 반응도 많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뛰어나온 것에 대해 주변에서 염려와 걱정을 많이 합디다. 물론 모든 승부에서는 승패가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반목이 지속되는 우리사회에서 무언가 통합의 길을 찾아보자는 의미에서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당락과 승부와는 상관없이 국가가 길러준 자원 중 한사람으로서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주세요. 국민성원이 작으면 작은대대로, 크면 큰대로의 역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창(反昌) 라인의 후보단일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들과의 합류여부는.

"나의 정치적 노선은 동서갈등을 해소하고 남북통일로 가자는데 있습니다. 기본 질서를 새롭게 창출하자는 의미이므로 이런 내 뜻과 부합하는 세력이라면 함께 할 수도 있겠지요."


전두환 전 대통령 반대 불구 출마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 분이 뭐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까'라고 묻더니 '반대하셨을 것 같다'고 답하자) 염려를 하셨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여러가지로 염려하셨는데 내가 결례를 했죠. 하지만 (선거를) 잘 하면 나중에 모실 때 더욱 정성들여 모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뵐 면목이 없겠죠" (이어 '어때요, 질문에 답이 됐습니까'라고 말하며 또 한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전 전대통령 측의 반응을 묻는 질문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 구 민정계 인사들을 포함, 5공 인맥과의 제휴를 고려하고 있는지.

"단기필마로 대선출마를 선언했으니 조직을 구성한다든지 캠프를 대대적으로 만든다는 등의 구성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인녕을 맺은 분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북한 핵문제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 합니다.

"나는 오히려 북한 핵문제가 터짐으로써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 열렸다고 봅니다. 이젠 북은 두가지 선택 밖에 없어요. 핵 개발을 전면 포기하고 국제무대로 나오는 것과 그대로 외길을 고집하다 국제사회의 응징을 받는 길 뿐이죠. 여기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되 재발방지 등의 강력한 정부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뒤에서는 핵을 개발하는 북측의 이중플레이에 대해 국민이 많은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끌어내면 평화통일로 가는 중요한 단초가 될 것으로 봅니다."


- 이회창 후보의 '병풍'과 정몽준 의원의 '재벌의 권력소유'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두 팔을 내저으며) 아이고,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큰 틀을 보고 판단해야지, 남의 조그마한 약점에 대해 이러고 저러고 얘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 출마에 대해 가족들은 어떤 반응이었는지.

"당연히 극력 반대했죠. 하지만 부창부수 아닙니까. 내 뜻에 따르게 됐지요('요새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말은 신세대층에서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다'고 하자 '그럼 부인 말에 남편이 따른다는 부창부수(婦唱夫隨)로 말을 바꾸겠다'며 여유를 보였다)"


- 앞으로의 포부가 있다면.

"나는 국가의 녹을 받으며 살았고 국가와 국익을 위해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번 대선에도 정치적 이해관계나 권력에 대한 탐욕 등 다른 욕심이 있어 나선 게 아닙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동서남북의 총괄적인 화해와 통합을 이룩해 보자는 뜻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가능한 대선전에 뛰어 든 것이죠.

여러가지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돈 없고 조직도 없고 지역기반도 없이 선거에 뛰어 들어 작은 승리를 이뤄낸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차후에는 더욱 선전화된 정치기반이 뿌리를 내릴 것이란 판단에서 나서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의미에서 국가에 봉사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뛰어갈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두환 사람'

장세동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주도한 1979년 12·12 사태를 비롯, 전 전 대통령의 수족역할을 도맡은 핵심 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88년 이후 각종 청문회에 불려다니면서도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주군격인 전 전 대통령을 엄호하고 나서 '의리의 돌쇠' '싸나이 장쎄동'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36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장씨는 세살 때 상경해 돈암초등-성동공업중-성동공고 등을 졸업했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납북돼 평생 군인의 길을 걷기 위해 육사16기로 입사, 60년 임관한 뒤 하나회 일원으로 군내에서는 비교적 탄탄대로를 걷는다.

65년 맹호부대 파월 중대장을 거쳐 77년 요직인 수경사 30경비단장(대령)을 맡으며 12·12사태를 지원했다. 5공 출범시 경호실장에 임명된 뒤 육군 중장으로 예편, 실세 안기부장을 맡으며 5공의 '2인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87년 박종철 사망사건의 여파로 안기부장 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줄곧 청문회 출서과 구속 수감 및 석방을 거듭하는 등 시련기를 맞았다.

노태우 정권 때는 권력남용 혐의, YS정권에 들어와서는 신민당 창당 방해사건인 이른바 '용팔이 사건' 배후로 지목됐고, 96년에는 12·12 및 5·18사태와 관련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세 차례나 구속되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수지 김 피살조작사건과 관련해 유족들에게 고소되는 등 검찰과의 악연이 계속돼 왔다. 그러나 장씨는 세 차례의 구속을 학사-석사-박사라고 수감생활이 끝나면 전 전 대통령에게는 "휴가를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등 한 시대의 풍운아로 많은 화제를 만들었다.

입력시간 2002/10/31 16:0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