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히피' 한대수

세상을 치유하려는 음악적 돈키호테, 앨범출반·활동위해 귀국

무엇이 변했나? 살집이 붙고 결혼도 했다. 그러나 고무신 신고 봇짐 하나 달랑 매고 방랑하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이 사내는 세상에 ‘위장 취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은? 54년째 지구상에 살며 이런 저런 인연과 업보를 쌓은 그를 아직도 ‘히피’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또?

평소 오전 11시는 족히 돼야 한대수는 잠에 든다. 11월 7일 함께 발매된 10집 앨범 ‘고민(Source Of Trouble)’과 ‘삼총사’의 마무리 작업 등 밤샘 작업이 끝나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즐기는 잠은 깊고 달다.

고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위해 몽고인 부인 옥사나와 떨어져 뉴욕서 건너 와 9월 15일부터 혼자 살고 있는 집이다


지구촌의 아픔을 담은 10집 앨범 ‘고민’

‘고민’은 최근 세계의 돌아가는 형국을 그가 음악을 빌어 고민했던 결과물이다. 또 ‘삼총사’는 국악에 심취한 메탈 기타리스트 김도균, 재즈 피아니스트 이우창 등 진보적 뮤지션들과 밤을 새며 했던 작업의 결과다. 10월 보름 동안은 16㎜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된 ‘다큐멘터리 한대수’가 대학로 동숭 아트 센터 등지에서 상영됐다.

“요즘 세계는 조지 부시와 럼스펠드가 고민을 안 하는 통에 문제 투성이 아닙니까?” 신보는 그가 21세기의 세계를 조망한 결과물이다. 웃통을 훌렁 벗어 던지고, 군살이 약간 붙은 몸으로 설거지를 하며 그는 천연덕스럽게 세상을 말했다.

“사실 가정 주부 역할을 제일 좋아해요. 돌아다니는 걸 딱 싫어해요. 여자로 태어날 걸 잘못 했어.”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고향인 부산 사투리의 억양은 죽어도 안 고쳐진다.

새 앨범에서 그는 현악을 깔고 포크적인 분위기를 짙게 했다. 자신의 음악은 세상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가수의 음정(피치)까지 멋대로 조정하는 요즘 컴퓨터 녹음이 어디 음악이냐”며 그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영 껄끄러운 표정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낭송으로 펼치는 ‘호치민’ 같은 곡은 아예 헤비 메탈 반주다.

현재 통용되는 그물망으로는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 한대수에게 가장 빨리 다가서는 길은 스스로 가장 애착을 갖는 곡에서부터 접근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물좀 주소’, ‘옥이의 노래’, ‘행복의 나라’, ‘바람과 나’ 등 1970년대 이후 대학가를 점령했던 일련의 포크와 최근작 ‘Paranoia’ 등이 그가 꼽는 곡이다.

그는 “묘하게도 내한테는 20대 팬들이 많다”고 말했다.

자신의 웹 사이트(http://handaesoo.co.kr)에 들르는 사람도, 자신에게 사인을 요구하는 사람도, 최근 출간된 사진집 ‘침묵’을 사 가는 사람도 대개 젊은 사람이다. 찌르고 솟구쳐 오르는 그를 기성 세대는 감당할 엄두도 못 낸다. 본인은 ‘묘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 같은 현상은 당연하다. 또 그것은 히피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영광일 지 모른다.

‘공산주의의 몰락이 반드시 자본주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모든 구멍이 만족할 때, 당신은 행복한 남자이고 더더구나 행복한 여자이다.’ 현자의 통찰 같기도, 포스트모던 아티스트의 악다구니 같기도 한 이들 촌철살인적 단상은 그의 최근 저작 ‘침묵’ 중 일부이다(푸른미디어 펴냄).

그는 국제 시인 사회에 등록돼 있는 진짜 시인이다. ‘침묵’에 영어로 수록돼 있는 단상들은 모두가 명징한 이미지와 딱딱 맞아 들어가는 운율로 무장돼 있는 시다.

‘내 시는 내 마음속의 응접실이며 안방이며 때로는 화장실입니다. 여러분, 즐기십시오!’ 1997년 3월~6월 태국과 뉴욕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과 틈틈이 지어 둔 시를 묶어 만든 책은 우리 시대의 치부를 드러내, 때로는 야유하고 때로는 고민한다. 비교적 객관적이라 믿는 뉴욕 타임스를 10년째 보고 있다. 요즘은 일요일 아침 6시부터 3시간 동안 일요판을 집중 탐구한다.


베토벤의 고통을 몸소 느끼는 ‘세월’

그렇듯 정신은 언제나 첨단이지만, 몸은 세월을 못 속인다. 한자리에서 세 병은 들이켰던 소주가 요즘은 한 병으로 줄었다. 10년전부터 시력이 가기 시작하더니, 5년전부터는 청력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만년에 눈과 귀가 멀었던 베토벤 할배의 기분과 고통을 충분히 알겠어요.”

그럼에도 그는 배움에의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아직도 새로운 음악을 공부하려 한다. “이제 시집도 내고 신보도 발표했으니 한 1년 정도는 새 악기 공부에 전념하고 싶어요.” 10년전 국립 국악원에서 레슨 받다 만 거문고에 이번에는 한 일년 매달릴 계획이다. 또 해금 비슷한 몽고 악기 마링홍도 공부할 작정이다.

한국 통기타의 대부 서유석과의 조우 순간은 인간 한대수를 잘 설명해 준다.

“명륜동 살 때 동네 깡패한테 억울하게 맞고, 당시 언뜻 알고 있던 서유석씨를 찾아갔지요. 만나는 자리에서 기타를 한 번 연주해 줬더니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에요.” 곧 서씨가 경영하던 쌀롱 ‘카사노바’의 지배인이 출동해 깡패를 흠씬 두들겨 주었다. 동네 체육부장도 겸하고 있던 지배인의 주먹다짐에 일은 뒤끝없이 마무리됐다.

이후 급속히 가까워진 둘은 생맥주 클럽 ‘OB’s 케빈’에 있던 작은 공간 ‘마음과 마음’에 함께 출연, 각각 30분씩 번갈아 노래를 들려 주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 땅에 생맥주와 라이브 음악이 태동한 1969년의 풍경이었으며, 그 가운데에 한대수와 서유석과 동네 주먹이 ‘낭만적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방황은 영원히 계속될 것

미국을 뜨고 귀국한다는 소식을 접한 모 신문 기자가 “언제 귀국 하느냐?”고 물었을 때, 당시 기분좋게 취해 있던 그는 “영원히 갑니다”라고 답해 주었다. 그러자 하루 뒤, 그 신문에 떡 하니 ‘한대수 영구 귀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술이 기분 좋게 올라, ‘영원히 갑니다’라고 한마디 해 줬더니…”라고 한대수는 킥킥댔다.

자신은 진실을 말했음에도 세상은 자신을 그렇게 ‘오독’하고 있다. 진실과 오독의 틈새는 그러나 유쾌하게 다가온다. 자유를 찾아 헤매는 그의 방황은 영원히 계속된다. 기존에 너무 경황 없이 발표했던 탓에 한번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일련의 LP를 다시 정리해 발매하는 작업도 남겨 두고 있다.

여전히 마리화나의 역사에 대해 노래하고, 반 고흐와 니체와 이야기했다고 해서 노래하는 한대수를 가둬둘 수 있는 그물은 없다. 지금의 장발은 17살 이후 계속돼 온 것. 딱 3년 짧았는데, 해군에 들어가 진해 구축함에서 복무했던 기간이 바로 그것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11/1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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