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전통주 전문가, 중앙대 정헌배 교수

"우리 술이 판치는 술판을 위해…"

술이 있는 곳에 정헌배(47)교수가 있다. 주종을 막론하고 주량은 고작 두 잔. 그러나 어느 ‘주태백’도 못 당하는 술박사다. 미미한 술맛의 차이까지 감별해내는 것은 물론 주조법이며 술의 역사, 문화까지 통달했다.

‘술 주(酒)’자가 붙은 행사나 모임, 행사, 회의치고 그가 안 불리는 자리가 없다. 주류제조회사의 신제품 시음회나 전통주 품평회, 주세나 공정거래, 규제개혁문제 등 정부의 정책회의에도 빠지지 않는 전문가다. 현재 청소년보호위원회 약물분과위원장으로도 활동중인, 자타가 공인하는 주류분야의 마당발이다.

연구소에서도 술병에 둘러싸여 산다. 개수가 천여개에 달한다. 모두 술이 찰랑거리는, 그것도 직접 빚은 술이 채워진 병들이다. 학교에서도 ‘명주와 주도’라는 제목의 강의를 몇 년째 맡고 있다.

중앙대에서 수강신청하기 가장 어렵다는 인기과목이다. 접수를 시작한 후 5분이면 120명 정원이 벌써 마감된다. 첫 강의때는 멋모르고 인원제한 없이 신청자를 받다가 700명까지 몰려들어 한학기 동안 대강당에서 진땀을 뺀 적이 있다.

전공은 농학도, 식품영양학도 아닌 경영학. 언뜻 봐서는 별 상관도 없어보이지만 듣고 보면 납득이 가는 연결이다.

“산업 중에서 최소 비용으로 가장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찾다보니 제 생각에 술이었습니다. 재료도 간단한데다 당장 안 팔리더라도 오래 두면 둘수록 더 가치가 올라가니 그만한 상품이 없는거죠.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주제도 ‘세계 주류 시장의 마케팅 전략”이었고 술시장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술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의 세계에 빠진 경영학도

영남대 경영학과 2학년 때부터 준비한 길이다. 1974년 친구들은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 그는 술의 나라 프랑스로 향했다. 파리 9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첫 시험에서 한 과목을 빼고는 모두 낙제점수를 받았다. 언어장벽부터가 큰 짐이었다.

전 교재를 달달 외다시피 공부했던 그는 곧 신선한 발상들과 연구로 교수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포도주의 구조적 특성, 코냑의 세계화 전략, 맥주의 중장기 소비전략 등의 논문을 써냈다.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한 교수의 도움으로 파리 상공회의소에 취업하게 되었다. 가난한 유학생의 생계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그곳에 있는 술 관련 자료들을 마음껏 열람할 수 있어 좋았다.

세계의 명주 주산지를 둘러볼 기회를 얻은 것도 상공회의소의 지원 덕분이었다. 프랑스의 코냑은 기본, 세계를 돌며 영국의 스카치 위스키, 러시아의 보드카, 서인도제도의 럼 등 이름이 알려진 술마다 제조현장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뉴욕으로 가던 날, 폭우가 내린 케네디공항의 침수사태로 엉뚱한 몬트리올에 내려 혼쭐이 난 일도 있다. 스코틀랜드를 찾은 날에는 뜻밖의 파업사태를 만나 곤욕을 치렀다.

고행 끝에 완성한 것이 세계적 명주의 성공과 실패의 요인을 분석한 연구논문이었다. 예를 들면 코냑과 스카치위스키는 어떻게 세계화에 성공했으며 럼과 보드카는 왜 ‘동네술’ 신세로 전락했는가에 대한 보고서였다. 프랑스 코냑 지방은 인구가 3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그러나 그 작은 ‘동네’에서 나온 술이 전세계 200여개국에 팔려나가면서 엄청난 수입을 안겨 주고 있었다. 조사 당시 우리나라가 TV 수출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반면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마신다는 술이 럼주. 그러나 알고보면 자신들이 만들고 자신들이 마셔대는 ‘동네술’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특화 여부가 관건이었습니다. 코냑의 경우, 원료로 쓰는 포도도 반드시 코냑 지방에서 재배된 것만을 사용하고, 그외 발효, 증류 등 모든 공정을 반드시 현지에서 처리하도록 돼 있어 코냑 지방에서 만든 것이 아니면 그런 술 맛이 나올 수 없게끔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보드카나 럼은 누가 어디서 어떤 곡물로 만들든 다 보드카이고 럼으로 칩니다. 철저한 특화 없이는 세계적인 명주가 탄생할 수 없습니다.”


인삼주는 경쟁력있는 우리 전통주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84년에 귀국해 중앙대 교수로 부임했다. 외국에서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때부터 우리의 명주 찾기에 나섰다. ‘향약집성방’ 등 조금이라도 술이 언급된 내용이 있으면 고문헌을 뒤지며 정보를 모았다. 전통주를 만드는 곳이라면 전국 어느 곳이든 안 찾아가 본 곳이 없다.

그러나 화려한 소문과는 달리 제대로 전통주다운 전통주의 전승이 이뤄지고 있는 곳은 한군데도 발견하기 힘들었다. 지난 역사의 공백기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고려말까지도 발효주가 번성했던 우리나라는 1907년부터 민간의 술제조가 법적으로 통제되기 시작해 1937년에는 국내의 전통주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나마 조금씩 전통주 붐이 다시 일어나고 주류업계에 새로운 활기가 더해진 것은 1990년대부터. 술박사 정 교수의 활약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세계시장에 내세울 우리의 전통주로 정교수가 마침내 찾아낸 것은 인삼주였다. 인삼은 이미 어느 정도 세계의 인지도가 쌓인 상태. 그 어느것보다 유리하게 술시장을 석권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인삼주라는 인삼주는 다 구해다 분석해봤습니다. 그런데 시중에 나와있는 기존 인삼주는 대부분 소주에다 인삼을 침출시킨 것들이라 전통주로도 볼 수 없고, 맛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북한 인삼주까지도 구해서 조사해봤는데 이것은 독성이 있어서 기본적인 음용수 기준에도 불합격 판정을 받을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직접 인삼주를 담그기로 했다. 제대로 된 발효, 증류, 숙성과정을 거쳐 인삼의 효능과 향취를 살린 인삼주로 세계화 브랜드를 만들어보자는 발상이었다. 성공하기만 하면 국내 인삼농가에도 영원한 활로를 틔어주는 셈이었다. 1997년 국책사업으로 선정돼 농림부의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인 연구개발에 들어갔다.

우선 어떤 지역의 인삼이 가장 술원료로 적합한가에 대한 실험부터 필요했다. 인삼을 들여오던 날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인삼조합의 협조로 전국의 지부에서 일제히 특정한 날짜를 기해 동시에 인삼을 채취, 전국에서 합심해 뽑아올린 인삼이 정 교수에게 배달되었다.

술을 빚는 일 자체만도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제조장비조차 마땅히 없어 두산기술연구소로부터 시설을 지원받았다. 재료는 한국식품개발연구원에서, 술을 만드는데 가장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효모는 배상면 주가에서 지원해주었다.

그러한 제조실험을 3년간 거듭, 현재 정교수가 가진 1,000여개의 술병들은 모두 그 결과물들이다. 이미 최적의 제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 특허를 갖고 있는 정교수는 자금만 갖춰질 경우 당장이라도 인삼주를 세계 시장에 내놓을 채비가 끝났다.

다들 ‘불가능하다’며 말린 일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다. 그간 학계와 주류업계, 생산농가와 정부관계자 등이 모인 가운데 품평회를 세차례나 개최해 호평을 받았다.


술 ‘잘마시는’ 사회 돼야

술은 ‘마시는 것’보다 ‘잘 마시기’가 더 어렵고 중요하다. 정부의 주류 관련 정책 수립에 있어서도 정 교수는 영향력이 적지않다. 술로 인한 사회의 후유증에 대해 특히 그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 MIT대학에서는 신입생 환영회 때 과음으로 신입생이 사망하자 학교측이 이에 대한 책임으로 유가족에게 52억원을 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장학기금을 조성하는가 하면 유족의 가계에서 진학희망자가 나올 경우 대대손손 누구든 우대하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똑같이 과음사가 발생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곳도 없고, 하다못해 거리에서 추태를 부리거나 행패를 부려도 ‘주사’쯤으로 넘어가줍니다. 우리 사회는 너무 술에 관대합니다.”

청소년의 음주는 특히 심각한 문제다. 보다 강력한 여과장치를 위해 그가 주장한 것이 ‘주류 전문 소매점’ 제도 도입이다. 이에 대한 논의가 흘러나오면서 정 교수는 주류제조업자들로부터 협박을 듣기도 했다. “만약 그 일을 계속 추진한다면 당신 집 앞에 상여를 가져가 시위를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사회적 책임에는 무신경한 채 술 판매량에만 민감한 이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도 우리나라의 건강한 음주사회 건설에 몸을 바친, 주류분야의 유관순 열사처럼 될 수 있을테니까 도와주시면 더 고맙겠다구요.(웃음) 그러자 잠잠하더라구요.”

한해 고급 양주 소비량만 약 120만병에 육박하는 거대한 술꾼들의 나라. 건강한 음주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작업 하나로 그는 요즘 ‘한국 술문화재단’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홈페이지(www.sul.cc)까지 정비해 놓았다. 문제는 자금. 그런데 정작 국내 술제조업자들은 외면하는 반면, 당장이라도 기금을 대겠다고 나서는 곳은 외국계 주류회사들이다.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를 위해 뛰어온 그로서는 참 한숨 나는 딜레마다.

이런 스트레스 앞에서 그도 술로 화를 풀까? 그러나 주량이 달랑 두 잔, 술이 아니라도 그를 더 잘 취하게 하는 것이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 부는 트럼펫이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학교 악대부 악장이자 트럼펫 주자였던 그는 가정 형편상 음악인의 꿈을 접고 경영학도가 되었었다. 한참 후의 일이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정년 퇴임식도 음악회로 꾸며볼 계획을 갖고 있다.

송년회 시즌을 앞두고 술박사가 전하는 쓴소리 한 말씀. 우리의 ‘술판’은 이것으로 접는다.

“좋은 술?마셨다길래 물어보면 ‘200만원이나 썼다니깐!’ ‘양주 다섯병이나 깠어!’ 같은 소리 좀 제발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맛이 어떤지는 신경도 안쓰고 술병만 세다 오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입력시간 2002/11/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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