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타협하기에는 전 아직 너무 젊나봐요"

몸(?)바쳐 일하지 않으면 '뜨기'힘든 부조리한 현실 경험

봄비가 내리는 2003년 3월6일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미국 워싱턴 D.C. 근처의 버지니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가슴 저미도록 밀려오는 허탈한 감정에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는 편이 속 시원하지(^^).

지난해 11월 중순 한국에 올 때 만 해도 연기에 대한 다부진 꿈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하지만 4개월간 서울에서의 생활은 기대와 실망, 좌절의 연속을 반복하며 제풀에 탈진하는 순간들의 반복이었다. 몸뚱이 하나로 연기자가 된다는 막연한 분홍빛 ‘스타의 꿈’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다.

기획사나 연기학원에 거는 기대감도 더 이상은 없다. 주변에서는 “너만큼 발랄하고 깜찍한 스타일은 무거운 연기보다는 시트콤이 더 잘 어울린다”고 격려해주며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 자신감을 회복하라고 조언한다.

그래! 이 마당에 벌써 좌절할 수 없다는 각오가 다시 불끈 쏟아 오른다. 하지만 영주권 재발급 문제라는 그럴듯한 이유(excuse)도 있으니 일단 서울에서는 후퇴다. 일보(一步) 전진을 위한 이보(二步) 후퇴라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을 상할 것까진 없다. 서울이여! 조금만 기다려다오! 봄 기운 완연한 5월에 새 각오로 다시 돌아올 때 까지!

이름=유해인(본명 인현주). 나이=23세 (80년 4월2일생). 키=169cm, 몸무게=45kg. 신체 사이즈=33-24-34. 취미=빠른 록 등 헤드 뱅잉으로 음악 감상. 경력=2002 미스코리아 워싱턴 진. (현주의 프로파일)


잊지못할 환희의 순간

2002년 4월19일. 이날 만큼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순간이엇다. 내가 다니던 버지니아주 노바컬리지(Nova Collegeㆍ경영학 전공) 강당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워싱턴 선발대회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영예로운 워싱턴 진에 뽑혔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여자로서 한 번쯤은 꿈 꿔왔던 순간이 나에게도 현실로 다가왔다. 미스코리아 본선대회에 나갈 수 있는 영광은 어릴 적 TV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면서 현실로 됐으니.

사실 나는 ‘미스코리아’ 하면 떠오르는 고전적 상징인 사자머리(?)나 강한 느낌을 주는 인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본선 대회에서 등수에 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리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연기자의 꿈은 미스코리아 대회 참가로 어느 정도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크게 들떠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냉정하게도 박차버렸고 3주간의 합숙에 참가했던 추억만으로 족해야 했다. 그러나 실망했던 만큼 반전의 기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에는 도전한다.


기획사 요구 거부… 고생문 열려

미스코리아 출신이면 누구나 가장 먼저 접혀야 하는 것은 기획사와의 계약과 CF촬영. 10 여 곳의 크고 작은 기획사들이 역시 ‘나를 알아본 듯( )’ 연락을 취해왔고 들뜬 마음에 이곳 저곳과 마라톤 인터뷰를 했다. 기획사들은 한결같이 “이 바닥에 들어 온 이상 몸을 내던져서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며 “스폰서도 있어야 하므로 기획사 사장이 시킨 일(?)은 무엇이든지 감수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라는 식으로 나를 종용했다.

아직은 어려서인지 고생을 덜 했던 까닭인지 이 같은 말을 들으면서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꼭 몸(?)을 내던져서라도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성공할 것이라고 보장 받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컸던 때문인지 이 같은 기획사들의 ‘겁주기’를 그냥 곧이 곧대로 받아 넘길 수가 없었다.

미스코리아 본선 당시에도 압구정동 거리 한 복판에서 비키니만을 입고 걸으며 사진을 찍으라는 것에 울컥 화를 냈던 내가 아닌가. ‘한 성격’하는 나로서는 기획사들의 충고 아닌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생문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미스코리아 본선대회가 끝나고 한 달 가량을 프로필 사진을 준비하고 기획사들을 만나며 꿈 같은 시간을 보냈고 운 좋게도 ‘유니온 베이’라는 캐주얼 의류업체에서 카탈로그 모델 제의가 들어왔다.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배우 장동건과 함께 사진을 찍는 신이었다.

이 때만 해도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인생최고의 시점에 오른 듯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리스마 강한 장동건의 눈빛을 바라보며 바로 저런 강한 눈빛이 마치 내 눈빛인양 착각으로 공주병에 빠져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8월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닥쳤다. 아버지를 닮아 하체가 남들에 비해 길고 얼굴이 조그만 한 것이 자랑인 나다. 아버지의 소식에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실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서울을 떠나야 하는 나는 아쉬움이 무엇보다 컸다. 일이 잘 풀려 막 탄력을 받는 상황이어서 더욱 그런 심정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에서의 3개월은 마치 3년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건강은 호조 됐지만 기획사들이 하던 ‘험난한 얘기’를 가족들에게 들려주니 “당장 그만두라”는 성화와 꾸지람이 빗발쳤다. 3여 중 막네 딸인 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서울을 다시 나가겠다’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한 채 하루도 마음 편 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설득 작전이 먹혔다.

마침내 가족 전체가 동의하는 분위기까지 오면서 몸 관리 하라며 한약까지 다려 주었다.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꿈을 향해

11월 다시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서울이었던가. 공항을 빠져 나오며 저녁무렵 석양에 하나 둘 씩 켜지는 가로등 불빛이 너무나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서울에 돌아온 후 다소간의 공백 때문인지 특별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단막극 캐스팅 등 각종 오디션에 기웃거렸지만 막상 성과는 크지 못했다.

그나마 ‘프롬 리빙’ 등 잡지사들의 뷰티 섹션에 모델로 기용되기도 했지만 꾸준히 들어오는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수입도 작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CF일 뿐 아니라 연기 등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보다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미스코리아 본선에 함께 나갔던 몇 몇 친구들은 TV 방송의 리포터나 쇼 프로그램의 출연진으로 나서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 일부는 방송계 일을 단념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기획사도 없이 연기에 집중해 혼자서 배역을 찾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던 나로서는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기’와 같은 결과만이 이어졌다. 각종 오디션에 참가해보았지만 이미 선정된 후보가 있어 형식적인 오디션들 뿐이었다. 또 아직까지는 연기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쉽게 배역을 구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나는 새롭게 연기학원에 등록하고 1주일에 3차례 이상 찾아가서 표정연기, 발성법, 대사연기 등을 배우며 열심히 노력했다.

또한 몸 만들기를 위해서는 재즈 댄스 학원도 불사했다. 마침 미스코리아 본선에 같이 참여했던 가까운 언니를 통해 기획사를 소개 받게 됐다. 하지만 한 기획사에 얽매일 경우 ‘향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선뜻 계약을 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다. 또 몸(?)을 던져 일해야 한다는 것 역시, 처음이나 지금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어서 차일피일 계약을 미뤘다.

버지니아 집에서는 “괜히 몸 버리고 후회할 바에는 차라리 짐을 싸고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결국 그러다 보니 기획사 역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나로서는 기획사에 기대는 것 보다는 스스로 직접 열심히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 지금으로선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방송국 작가와 감독(PD) 등을 만나고 오디션을 보면서 최근엔 인천방송 i-TV의 연속극에 단역을 맡기도 했다. 또 가까운 한 언니의 소개로 여성전문잡지 ‘코스모 걸’ 런칭 행사의 사회로 일을 하게 됐다. 한국어와 영어로 함께 진행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경쟁력이 있었다.

물론 밤을 세워 연습을 했지만 일이란 한 번 탄력을 받으면 더 속도를 받는 때가 많다. 아직까지는 젊기에, 자존심을 팽개쳐두고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맥과 돈으로 형성된 연예계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타협하기엔 아직까지 내 나이는 젊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몇몇 선배나 친구들이 TV방송에 화려하게 ‘뜨는’ 모습을 지켜보면 솔직히 갈등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서울을 떠나 다시 미국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예전같이 ‘업(up)’ 될 수 없는 것도 성공과 자존심간의 긴박한 갈등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젊기 때문에 연기면 연기, 모델이면 모델이라는 식으로 속단하기 보단, 자신에 대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존심을 버려서 까지 쉽게 성공하기엔 너무 젊은 탓인가 보다. 발랄하고 깜찍한 내 연기가 언젠가는 먹힐 날이 충분히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비록 이번에 큰 성과 없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보다 체계적인 전략을 세워서 5월쯤 다시 서울로 돌아올 계획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

2002 미스코리아 워싱턴 진 인현주

입력시간 2003/03/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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