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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파괴] 올빼미族, 달밤에 체조를 한다?

[시간파괴] 올빼미族, 달밤에 체조를 한다?

밤을 낮처럼… 문화·레저산업 시간파괴 붐

회사원 J(42)씨는 지난 주말 오랜만에 강남에 나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늘상 달라지는 강남의 모습에 놀란 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 저편에서 배꼽을 드러낸 탱크톱과 미끈한 하체 선을 강조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땀을 흘리는 젊은 여성들을 보는 순간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달밤에 웬 체조냐? 근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몇 시에 자냐?”함께 가던 친구도 놀란 듯 늘씬한 몸매를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진짜로 열심히 한다~”


서울의 밤문화가 바뀌었다

4월23일 밤 10시 30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피트니스 센터’엔 젊은이들로 만원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총 5개 층으로 구성된 2,000여 평 규모의 초대형 센터 안은 땀을 흘리는 젊은 직장인들로 붐볐고, 1,300여 개인 사물함에 빈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밤을 낮 삼아 피트니스 클럽에서 운동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부쩍 늘었다. 기업 홍보실에 근무한다는 이기연(29)씨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지난 2월 말부터 체력 단련을 위해 밤마다 피트니스 클럽에 다닌다.

“밤에 인터넷을 하고 책을 읽는 등 낮에 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다 보면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기 힘들어요. 밤이 돼야 몸도 좀 풀리는 것 같고…. 운동도 밤 시간에 마음 편하게 하는 게 좋아요.”

동료들 사이에서 잠 많기로 소문난 회사원 K(31)씨도 최근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했다. 김씨는 원래 퇴근해 TV나 비디오를 보다가 잠을 자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야간에 운동을 하게 된 것은 밤시간을 활용하는 동료들을 보고 “이러다 내가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퇴근해 집에서 저녁 먹고 와서 밤 12시까지 여유 있게 뛰다 가요.”

사실 심야에 워킹기구 위에서 달리는 모습은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미 보편화된 현상이다. 이 헬스클럽의 홍보팀 조희령씨는 “올빼미족들이 많아 밤에 더 붐빈다”며 “낮에는 운동 기구 이용률이 30%에 불과하지만 8시 이후에는 120%에 달해 순번을 기다려야 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운동만이 아니다. 밤을 낮처럼 생활하는 올빼미족들이 서울의 밤 문화를 바꾸고 있다. 밤에 퍼머를 하거나 네일 케어를 받는 등 야간 미용을 즐기는 젊은 여성의 등장으로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

시대 흐름에 따라 “늦게 자는 여자가 아름답다”는 ‘나이트 뷰티’ 바람이 거세다. 여대생 등 젊은 올빼미족이 많이 찾는 이화여대와 신촌 부근의 야간 미용실과 네일 숍, 찜질방에는 늦은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학원 강사 장희연(30)씨는 자정 무렵 학원이 있는 중계동에서 이대 앞의 미용실까지 달려왔다. 이 곳은 새벽 3시까지 문을 열어 놓는다.

“오후 10시가 돼야 일을 끝마치는데 그 시간에는 동네 미용실이 문을 닫잖아요. 그렇다고 주말에 머리를 하다 보면 황금 같은 휴일이 그냥 다 지나가 아까워요. 그래서 새벽까지 문을 여는 미용실을 찾죠. 오랜 만에 시내 중심가에 나와 스트레스도 풀고 헤어 스타일도 바꾸는 거죠.”


극장ㆍDVD방 성업, 놀이공원은 만원

평일 밤 시간대에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보니 인근의 커피숍이나 분식점 등 먹자 골목도 24시간 운영을 상시화하는 추세다. “다른 집에서 심야 영업을 하기 때문에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24시간 문을 열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손님이 뚝 끊겨 버린다”는 게 업소들의 입장이다.

평일 밤 시간대를 이용해 극장이나 DVD방을 찾는 이들도 크게 늘었다. 특히 스타식스 정동이나 신촌 영화나라, 목동 킴스 시네마 등은 아예 야간에 영화 3편을 패키지 프로그램으로 묶어 보여준다. 강점은 두 편 가격인 1만 4,000~1만 5,000원에 3편을 볼 수 있다는 것.

인터넷 사이트나 명동, 종로 일대 커피숍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할인 쿠폰을 들고 가면 1만원 안팎에 세 편의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조용한 시간에 혼자 영화의 멋을 음미하려는 ‘나홀로족’과 야간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들의 호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영화마니아인 회사원 H씨는 금요일 저녁이면 심야 영화관을 즐겨 찾는다. 주말 낮 시간에는 ‘입소문이 난 영화’는 일찌감치 매진돼 헛걸음을 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싼 값에 최신 영화 3편을 볼 수 있어 마치 영화제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게 H씨의 말이다.

예전에는 철 지난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지만 요즘에는 최신 신작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대형 DVD 시설을 갖춘 24시간 DVD방이나 프로젝터로 영화를 틀어주는 만화ㆍ영화 까페도 젊은이들 사이에 꽤 인기다.

번잡한 주말을 피해 한적한 평일 밤 시간대에 놀이공원을 찾는 연인이나 가족들도 부쩍 많아졌다. “인기 있는 놀이시설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고 비용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버랜드, 롯데월드 등 대부분 놀이공원들은 오후 5시 이후 입장할 경우 야간 할인 요금을 적용한다. 에버랜드의 경우 2만 8,000원인 성인 자유이용권을 야간에는 2만 4,000원에 판매한다.

에버랜드 홍보팀 송대우 주임은 “심야에도 주차장의 빈 자리가 거의 없다”면서 “야간에는 마법과 판타지를 주제로 한 퍼레이드나 레이저 쇼 등 낮보다 더 낭만적인 프로그램이 많아, 심야 열기가 더 뜨거운 편”이라고 말했다.

심야 쇼핑도 올빼미족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점점 해가 길어지고 주 5일 근무제가 확산됨에 따라 심야 쇼핑에 나서는 이들이 늘고 있다. 새벽 5시까지 문을 여는 동대문 패션몰들은 심야 의류 쇼핑 명소로 자리 잡은 지 오래고, 과거에 비해 다소 위축하긴 했지만 밀리오레 프레야타운 두타 등 10여 개 도소매 쇼핑몰도 밤을 잊고 성업 중이다.

밀리오레는 야간 고객을 위해 24시간 문을 여는 스포츠마사지실, 당구장, 미용실, 카페 등을 한 건물에 갖춰 다양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프레야타운도 극장, 게임룸, 사우나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심야 쇼핑객을 맞는다. 특히 멀티플렉스 극장(MMC)은 오후 6시 이후에만 매일 3,000여 명의 관객이 몰리는 등 큰 인기다.


대형할인점ㆍ병원 ‘골든타임’변화

쇼핑 혼잡을 피할 수 있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물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야간 쇼핑의 매력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민동원 연구원은 “야간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상식이 무너졌다”며 “유통업계가 24시간 쇼핑을 주도함에 따라 이에 발맞춰 영화ㆍ음식 등 문화 산업도 동반 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아예 야간 할인점 쇼핑이 하나의 생활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퇴근하는 남편과 함께 할인점을 들려 여유 있게 물건을 고르고 오붓한 데이트도 갖는다는 것. 막판 떨이를 이용해 신선한 식품을 값싸게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

업계 관계자는 “맞벌이 부부와 직장 생활을 하는 독신자가 증가하면서 야간 쇼핑객도 계속 늘어나 업체마다 저녁시간대 판촉활동을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마트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매장을 찾는 고객을 위해 무료로 커피나 음료수를 제공하며, 계산 담당직원을 저녁 시간에 집중 배치해 고객의 대기시간을 줄여 준다.

킴스클럽은 야간 쇼핑객을 위해 각종 가격 할인 행사와 함께 구슬 굴리기, 보물찾기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홈쇼핑의 ‘골든 타임’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물건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간이 오전 10시~오후 3시였지만, 최근에는 9시~12시에 물품 주문이 급상승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또 평일 저녁 시간을 이용해 피부과나 한의원의 야간 진료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미리 전화 예약을 하고 가면 접수한 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어 편리하기 때문이다.

평일 저녁 시간에 ‘알뜰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 부부도 밤문화를 바꾸는 한 풍속도다. 축하객들의 식대가 할인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짜 2시간 이상 여유 있게 결혼식을 치를 수 있어 색다른 결혼식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즐기는 편이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밤을 잊은 ‘시간 파괴’ 문화가 이제 사회 전반에 거스를 수 없는 주류 문화로 떠올랐다. 낮보다 더 분주한 밤이 우리의 생활패턴을 바꾸고 있다. 달라진 밤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이젠 ‘쉰’세대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2003/04/3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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