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공연 현장스케치우리시대 아줌마 아저씨들의 '추억 되새김질'세월에 지친 어깨 들썩들썩, 감동의 무대에 열광의 도가니

[新문화주류] 청춘, 그 황홀한 기억 속으로
KBS <7080 보고싶다> 공연 현장스케치
우리시대 아줌마 아저씨들의 '추억 되새김질'
세월에 지친 어깨 들썩들썩, 감동의 무대에 열광의 도가니


2월 28일 저녁 5시. 공연이 시작되려면 두시간이나 남은 시간이다. 찬 바람에 비까지 흩날리지만 KBS홀 광장에는 40~50십대 중년들이 꼬불꼬불 늘어 섰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 그 행렬은 짧아들 줄 모른다. KBS창사 77주년 특집 ‘7080 보고 싶다’의 녹화 현장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다. 1월 25일 방송된 ‘열린 음악회-7080 추억의 그룹 사운드’의 감동을 다시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다. ‘7080’이란 말을 ’7순이나 8순의 연령대’로 알아 듣고 찾은 할머니들도, 초등학교 때 즐 듣던 곡들을 듣고 싶어 왔다는 30대들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70~80년대에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던 40~50대가 대부분. 비슷한 연배의 이웃, 고교 동창, 부부, 심지어 경기 안양 어느 고등학교 같은 반 학부형 모임에서도 여의도까지 원정을 나섰다. 엄마 아빠에게 청춘을 돌려 주기 위해 몰래 예약을 해뒀다가 끌고 왔다는 딸들도 보인다.(본방송 3월 1일.)

- "진작에 이런 자리 있었어야지"

“아니, 고생해서 키웠더니 자기들만 매번 쿵짝쿵짝이었잖아. 진작에 이런 자리가 있어야 했어.”인파를 헤집는 안내원 박정환(56)씨는 연신 싱글벙글. 비슷한 연배의 관객들을 안내하게 돼,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단다. 벌써부터 이렇게 달려드는 걸 보니 만원 사례는 떼 논 당상이라고. 6시 15분. 공연장 출입문의 빗장이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 들어가지 시작한다. 과연 저들이 자식들한테, 자기 학생한테는 ‘질서’와 ‘차례’를 강조하던 바로 그들인가 싶다. “이런 데 오면 그런 게 어딨냐, 텔레비전에 나오는 애들 모습 못 봤냐”는 항변에 기자가 머쓱할 판.

한켠에서는 챙겨온 김밥,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우는 이들도 상당수다. 좌석표까지 받아 놨는데 서두를 게 없다는 여유파다. 저녁도 거르고 왔는데, 일단 배는 채워야 고함도 지르고 박수도 맘껏 치면서 놀 수 있단다. 공연장 입구의 티켓 확인요원 송현미(23)양도 “오늘처럼 아줌마 아저씨들로 공연장이 꽉 찬 일은 입사 3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7시 5분, 본격적인 공연 시작에 앞서 꽉 찬 2,000여 방청객들 앞으로 한 FD(무대감독)가 섰다. 손바닥에 있는 수백개의 경혈 운운하며 바람을 잡는다. 결국 박수에 인색해 하지 말란 얘기. 말 않더라도 다 알아서 할 터인데, 늑장만 부리고 있다며 뒤에서는 볼멘소리다. 7시 10분, ‘7080 보고 싶다’막이 올랐다. 이들은 일제히 두 손을 쳐들고 손바닥에 불을 붙인다. 망원경, 디지털 카메라, 플래카드를 들고 엉덩이를 덜썩거리는 객석의 모습은 영락 없는 20대. 거대한 타임머신의 동승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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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보고 싶은 그때 그 댄스’가 늙은 20대들을 맞는다. 시커멓고 덥수룩한 퍼머머리의 가발을 쓴 무희, 나팔바지와 청미니스커트 등 휘황한 복장을 한 수십명의 무희를 감싸는 것은 촌스럽기 짝이 없는 디스코와 고고. 박수와 괴성이 단번에 터진다. 뱃살이 제법 붙은 아저씨중 몇몇은 참지 못 하고 일어 섰다.

“못~ 믿겠어, 떠난다는 그 말을. 안 듣겠어, 안녕이란 그 말을. 나 어떡해, 나 어떡해 ….” 휘버스의 이명훈이다. 그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그들은 너무 잘 안다. 외투를 던져 버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더러는 눈물마저 훔친다.

9시 5분. 두어 시간의 공연이 막을 내릴 시간. 전 출연자들이 나서서 ‘꿈의 대화’를 열창한다. 음악이 멈추고 무대는 암전을 시작한다. 객석은 반전을 획책한다. 약속이나 한 듯 “앵콜”을 연호하더니, 끝내 무대에 불을 밝히고 한 곡을 더 듣고야 만다.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 제작진들, 놀라운 호응에 신바람

이른바 IMF 환란 이후 불거졌던 오륙도니, 사오정이니 하는 신조어들은 40~50대들에는 자칫 386의 음모로까지 비친 저주의 말이었다. 뼈빠지게 일했던 우리의 젊은 시절은 무엇이었나, 누구를 위함이었나…? 억울함과 서운함만이 그들의 퀭한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바로 이 빈 공간을 ‘열린 음악회’제작진이 주목한 것이다. 인생의 장밋빛 나날이었던 20대의 영롱한, 그러나 너무나 허망하게 소멸된 흔적들은 기획자들에게는 절호의 문화적 아이템이었다.

이번 프로는 지난 구정때 특집으로 방영했던 ‘열린 음악회’의 후속편이다. 당시 ‘7080 추억의 그룹 사운드’라는 이름으로 방영됐던 본방송은 물론 재방송에까지 시청자들이 보내 온 반응에 제작진이 놀랄 지경이었다. 유찬욱(47)PD는 “‘나를 한 순간에 2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다시 젊어진 것 같다’, ‘다시 힘차게 살아야 겠다’ 등등 시청자들의 말이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켰다”고 말했다. 유PD는“나 개인으로 봤을 때, 이 프로는 방송국 생활 20년 중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 했다. ‘100분쇼’, ‘가요톱10’, ‘젊음의 행진’, ‘영스튜디오’, ‘유머 1번지’, ‘쇼 비디오자키’, ‘신혼은 아름다워’, ‘가요무대’, ‘뮤직 뱅크’ 등 오락 프로를 두루 제작한 노하우가 총결집된 프로라는 자평이다.

- 방청권 3시간 반만에 동나

이 프로의 성공은 2030을 위한 프로 일색인 방송가에 하나의 경고인 동시에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고령화 사회를 향해 내달리고 있는 한국 사회에 실로 필요한 시스템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동시에 최첨단, 최신 유행만을 추종하는 한국 방송의 생리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프로의 경우, 방청권을 인터넷으로 선착순 배포했는데 1,800장이 세시간반만에 바닥 난 일은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웅변하는 사례로 방송가의 화제로 떠올랐다.

그날 녹화 후, “20년 응어리를 풀어 놓고 간다”는 한 무리의 늙수그레한 여고 동창생들은 시끌벅적 사라졌다. 현재 이 프로의 홈 페이지에는 매일 150여건꼴로 중년의 아우성이 올라온다. 프로의 수명 연장, DVD 등 영상물 제작 등 후속타 논의는 제작진을 즐거운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오랜 추억의 시간들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의 지친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위안이 되고 활력소가 되더니,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됐다.

정민승ㆍ홍창기 인턴 기자

홍창기 인턴기자


입력시간 : 2004-03-02 16:59


정민승ㆍ홍창기 인턴 기자 prufroc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