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컨티넨탈 호텔 조리사 4人 '블랙박스 세트메뉴' 인기

“그거! 1등한 요리 주세요.”

서울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호텔의 스카이 레스토랑 ‘테이블34’. 고층에 자리해 도심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을 자랑하는 이 곳에 요즘 고객들이 줄을 선다. 화려한 야경 때문에? 아니, 세계 요리 대회에서 ‘우승’한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다.

최근 이 레스토랑의 최고 인기 메뉴는 ‘블랙박스 세트메뉴’. 지난 5월 중동의 두바이에서 열린 세계 요리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바로 그 음식이다. 대회 이름은 좀 길지만 ‘블랙박스 글로벌 그랜드 파이널 대회’, 그래서 메뉴 이름도 같다.

우승의 주역들은 이 호텔 조리사들. 복종대 조리과장(그랜드 키친 뷔페 레스토랑), 임호택(테이블34) 김유식(테이블34) 최진복(패스트리) 씨 등 4명이다. 이들은 전세계 19개국이 참가한 대회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한국 조리사팀이 해외에서 거둔 첫 쾌거이기도 하다.

호주축산공사가 주최하는 블랙박스 요리경연대회는 난이도와 공정한 대회 운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세계적 요리 대회로 꼽힌다. 무엇 보다도 이 대회의 특징은 ‘블라인드 쿠킹’(Blind cooking)이라는 점. 눈을 감고 요리한다는 것이 아니고 요리해야 할 식재료들이 ‘경기’ 직전에야 공개된다는 것이다. 어떤 상대방이 나올지 모르고 미팅에 나가는 ‘블라인드 데이트’와 같은 의미.

무슨 식재료가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오픈된다고 붙여진 이름도 그래서 ‘블랙 박스’다. 다른 대부분의 요리 대회가 조리사들 스스로 준비한 식자재와 메뉴로 출품, 승부를 겨루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과 비교해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리사들에게는 ‘가혹한’ 시험 일 수 밖에 없지만 블랙박스 대회는 조리사의 요리 실력은 물론, 창의성과 독창성, 순발력을 한 몫에 평가하기에는 그만이다. 물론 젊고 유능한 조리사를 발굴, 육성하려는 이 대회의 취지와도 일치한다.

올 해 대회에는 70여가지 식재료들이 블랙박스에 담겨 나왔다. 호주산 앵거스 곡물 비육 냉장 소고기와 양고기, 노르웨이산 연어와 광어, 송아지고기 육수, 체다 치즈, 참기름 간장 등 20여가지는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재료들. 그리고 당근 배 피망 생강 계란 우유 올리브 오일 등은 ‘사용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식재료들로 선정됐다.

우승 조리사팀이 만든 메뉴는 4가지 코스 요리. 브로콜리 무스를 곁들인 연어와 광어, 참깨를 곁들인 아이올리 소스가 애피타이저로 테이블에 올랐다.

1. 애피타이저=브로콜리 무스를 곁들인 연어와 광어, 참깨를 곁들인 아이올리 소스

콜드 푸드(찬 음식) 전문가인 임호택 조리사가 만든 이 메뉴는 식재료들로 마치 조형물을 쌓듯 플레이트 위에서 입체감을 구현한 것이 돋보인다. 일렬로 나란히 선 3개의 원통은 생선. 핑크빛 연어살 가운데 하얀 색의 광어 살점을 집어 넣고 원형으로 돌돌 말아 넣은 형태. 그 밑으로는 녹색의 브로콜리 무스를 깔아 안정감을 더해준다.

반대편에 ‘흐트러져’ 있는 조각들 또한 먹거리들. 크림치즈 젤리와 토마토 콘소메 젤리, 토마토 껍질 등을 잘게 썰어 뿌린 후 허브로 장식했다. 젤리는 시큼한데 안에 비니거소스를 넣은 때문이다.

그리고 플레이트 가장자리에 길다랗게 ‘칠해진’ 초콜릿 색 소스는 발사믹 리덕션(졸인 소스). 반대편에 보이는 노란 띠는 참기름 아이올리 소스다. 멋을 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역시 포크로 살짝 집어 맛을 봐야만 하는 ‘먹을 것’들이다.

2. 수프=체다 치즈의 필로 패스트리 주머니와 버섯 수프

핫 푸드(뜨거운 요리) 담당인 김유식 조리사가 만든 수프도 독특하다. 수프라면 당연히 ‘액체’일텐데 플레이트 위에 고체, 즉 빵 같은 것이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옆에 따라 나오는 조그만 컵에 양송이 버섯 크림 수프가 담겨 있다. 이 수프를 뿌려 먹는 것.

빵처럼 보이는 ‘문제의 그 고체’는 체다 치즈가 들어간 수플레. 계란 흰자에 약간의 밀가루와 감자 등을 섞어 틀에 넣어 오븐에 구워 부풀어 오르게 했다. 수플레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것은 필로 패스트리. 밀가루 반죽의 한 종류인 필로를 얇게 구워 바삭하고 고소한 맛을 더해주도록 한 것.

플레이트를 감싸듯 둥글게 퍼뜨려져 있는 것은 허브오일. 올리브 오일에 허브를 섞어 푸른 색이 나는데 수프에 허브향을 내도록 해 준다. 특히 뜨거운 수프를 부으면 오일이 위로 둥둥 떠오르며 원형 띠 모양을 형성해 낸다.

3. 메인 푸드=감자 퓨레를 곁들인 오븐에 구운 소고기와 절인 양 목살 티안

티안은 타워라는 뜻. 이름처럼 식재료들로 두바이의 높은 건물들을 형상화했다. 특히 탑 모양의 고기 장식이 돋보인다. 다 익은 살코기를 갈비찜을 만들 듯 바짝 익혀 틀어 넣어 뽑아냈는데 배인 소스 맛이 짭조스름한 듯 달콤하다.

그 위에 놓여진 노란 색의 동그란 공 같은 것은 의외로 소스다. 마요네즈와 비슷한 갈릭진저베냉소스인데 고기의 열에 의해 따뜻해지면 조금씩 녹아 내린다. 딱딱한 상태로 틀에 넣어 얼린 다음 살짝 튀겨 얹어 놓았기 때문에 ‘초반 잠깐’만 모양을 유지한다.

반대편에 보이는 하트 모양의 고기는 소고기의 란트란 부위. 지방질이 거의 없는 안심류로 버터에 싸서 천천히 스며들도록 오븐에서 천천히 구웠다. 밑으로는 으깬 감자가 모양을 받쳐주고 있다. 그리고 비트와 오이 당근 무 샐러리 등을 채로 썰어 리본 느낌이 나도록 장식한 ‘리본 베지터블’까지.

4. 디저트=블랙 페퍼 슈가 레이스와 과일 소스의 딸기 무스 케이크

최진복 조리사가 만든 디저트는 달콤하다. 밑에서부터 헤이즐넛 스펀지와 초콜릿류인 화이트 가나슈, 딸기 무스, 딸기 젤리, 멜론볼을 층층이 쌓아 여러 맛을 동시에 담았다. 멜론볼을 살짝 덮고 있는 얇은 원형판은 슈가 튜일이란 식재료. 일종의 설탕 장식인데 여기에 특이하게도 후추를 뿌려 매운 맛을 더한 것이 포인트다.

이 대회의 평가 방식은 독특하다. 블랙박스가 공개된 후 1시간 이내 만들 요리 코스를 적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24시간 동안 4명이서 34인분을 만들어야 하는 데 양이 제법 많다. 제출되는 음식은 모두 수백여명의 심사위원과 고객들에게 갈라디너 음식으로 제공된다. 우승 메뉴는 모던과 심플, 그리고 하모니의 컨셉이 특히 조명을 받았다.

“1등 보다는 2등을 더 원했어요.” 지난 해 국내 대회에서 1등을 거머쥐며 국제 대회 출전자격을 획득한 이들 조리사는 우승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평소 업무를 그대로 수행하면서 음식 연구와 공부, 연습 등을 병행해야만 했기 때문. 국내 대회에서 우승한다고 너무 고생한 것이 힘들어 농담이라도 2등을 해야겠다고 할 정도였던 것.

하지만 실제 우승에 대한 각오는 남달랐다. “생애 있을 마지막 기회인데 최고의 성적을 거둬야지요.” 대회 규정상 나이 제한(32세)에 걸리는 김유식 임호택 조리사는 “목숨 걸고 했다”고 말한다. 이들 모두 주말에도 출근하느라 연인과 헤어지거나, 결혼과 아기 낳는 것도 미뤄놓은 상태.

“보통 요리 대회 음식은 대회로만 그치는 것이 상례인데 이번 메뉴는 자신있게 고객들에게 선보이게 돼 기쁩니다.” 이들 조리사는 “음식 준비하러 주방으로 가야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블랙박스 세트메뉴는 8월31일까지 한시적으로 제공된다. (02)559-7631


글·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