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 우승 설움 딛고 진정한 PBA 챔피언 등극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부동심’으로 무장

프로당구 선수 최원준이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프로당구 선수 최원준이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PBA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간 선수로 최원준(45) 선수를 꼽는다. 프로 출범 원년에 ‘깜짝’ 우승으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 3년간 내리막길을 걷다가 존재감이 사라졌다. 부진이 길어지다 보니 그저 그런 반짝 선수였다는 평가가 뒤따랐고 그 역시 자신감을 잃어갔다. 하지만 최원준은 스스로 '반짝' 우승의 저주를 풀어냈다. 지난 11월 15일 2023~2024시즌 6차 투어 'NH농협카드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재기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무려 4년 2개월, 1538일 만이다. 그는 우승을 확정 지은 후 여느 선수들처럼 환호의 포효를 내지르지 않았다. 단지 먹먹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의 서러움, 자괴감, 패배의식 등을 벗어던진 그만의 의식이었다.

재야의 고수들 찾아 낭인 생활
찜질방서 숙식 해결하며 실전

전북 익산에서 자란 최원준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당구장을 찾은 이후 당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친구들과 자장면 내기를 즐겼지만 자주 물리는 편이었다. 오기가 생긴 그는 학교에 가기 전 새벽에 당구장 문을 열고 혼자 연습할 정도로 당구에 ‘올인’을 했다.

“어느 날 제 재능을 눈여겨본 당구장 사장님이 부모님께 연락해 서울로 당구 유학을 보내자고 권유했더라고요.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특히 아버지가 무척 엄하신 편이었는데 그 이후 당구장을 출입하다 걸리면 호되게 혼나기 일쑤였어요.”

부친의 눈을 피하면서 최원준의 당구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당구연맹 소속 선수로 등록해 선수의 길을 걸었다.

“말이 선수이지 대회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지만 대학교 졸업 1년을 앞두고 자퇴를 선택했죠. 아버지께서 전공책과 당구교본을 놓고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고 최후의 통첩(?)을 하셨는데 결국 당구교본을 택하자 제가 보는 앞에서 전공책을 찢어버리셨습니다.”

‘당구의 길’을 결심했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그 당시는 선배들이 자신의 노하우나 기술 전수를 피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어깨너머로 배우려는 시도조차 거부하기 일쑤였다. 재야의 고수들과 손을 섞기 위해서는 이른바 내기당구인 ‘죽방’의 세계로 입문할 수밖에 없었다.

최원준은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성남시에서 재야 무대를 뛰기 시작했다. 성남 부근에서 절대 강자의 지위를 누린 엄상필(블루원리조트) 선수와의 인연도 이때부터 이어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실력은 밑바닥이었다.

“젊은 나이에 생계는 힘겨웠지만 당구 실력을 더 쌓고 싶다는 일념이 충만했을 때 제 인생의 동아줄이 된 선배와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터전을 잡은 박찬호라는 분인데 그 선배 덕에 허튼 길로 빠지지 않고 혹독하게 훈련을 할 수 있었죠. 그 선배는 죽방으로 생계비를 벌어 미국에 먼저 간 가족들을 부양할 정도로 실력자였거든요.”

최원준은 찜질방 등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거듭했다. 그렇다고 선배 박찬호로부터 세심하게 당구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다. 서울이나 지방 곳곳으로 재야의 고수들이 모이면 출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을 뿐이다. 고수들과 직접 맞닥뜨려 배우라는 의미였다.

“몸이 아프거나 날밤을 새웠더라도 박찬호 선배가 지정해주는 장소에 시간 맞춰 가야만 했죠. 제 몸 상태에 대해 핑계를 댈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선배가 쥐여준 푼돈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그렇게 경쟁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투견’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이 당시 지옥 훈련으로 얻은 게 많다. 몸 상태가 어떻든 경기에 임할 수 있는 집중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을 핑계 삼는 일이 없었다.

두 번째 우승도 그래서 가능했다. 최성원(휴온스) 선수와 7세트까지 가는 초접전 끝에 결승에 올랐지만, 몸은 기진맥진 상태로 처지고 눈앞은 흐릿해졌다. 반면 상대 선수인 비롤 위마즈(웰컴저축은행) 선수는 최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서 결국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었다. 지옥 훈련을 몸이 기억한 덕분이다.

결혼 후 중고폰 도매상 전념
화물트럭 몰기 전 PBA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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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당구 선수 최원준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최원준의 20대는 재야 당구의 낭인 생활과 생계를 위한 직업을 오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발레 주차대행, 닭강정 납품, 아이스크림 영업 등 닥치는 대로 생계를 꾸렸다. 당구를 사랑했지만, 당구가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했던 탓이다.

의도하지 않게 선수의 길도 포기했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심성이 문제였다. 선수 등록을 말소하면 동호인 대회 참가도 금지됐다. 그는 동호인 대회라도 참가하기 위해 익산시와 전북당구연맹 사무총장(무보수)을 7년이나 역임했다. 사무총장을 맡는 조건으로 동호인 대회 참가를 허락받은 것이다.

“서른을 넘기면서 제대로 선수 활동을 하자고 마음을 다잡은 뒤 1년 만에 랭킹 30위권까지 올려놓았어요. 그러다 전북당구연맹 회장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를 밀었던 선배 부탁으로 연판장에 서명했다가 문제가 돼 선수를 그만뒀죠. 지역 내 얽히고설킨 인맥 때문에 스스로 은퇴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지인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2013년 결혼한 최원준은 동호인 대회 참가와 연맹 사무를 챙기는 일 외에는 생업에만 몰두했다. 후배의 소개로 낯선 휴대폰 중고도매업에 뛰어들었다. 매일 400여 곳의 매장에 전단을 배포하는 등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땀을 흘렸다. 덕분에 벌이도 쏠쏠했다.

생업에 몰두하느라 당구 연습은 언강생심이었다. 다만 퇴근 전 매일 1시간씩 휴대폰 영상을 켜놓고 당구장에서 자세와 스트로크를 점검하는 훈련을 매일 반복했다. ‘투견’ 시절 혹독한 훈련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나 단말기 지원금 상한제가 2017년 폐지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출시 15개월이 지난 중고 휴대폰에만 적용됐던 지원금이 풀려 최신폰도 지원금 혜택이 가능해진 것이다. 중고도매상으로서는 사망 신고나 다름없었다.

“사실 고민하던 끝에 아내와 상의한 후 지입 화물트럭을 준비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러다가 PBA가 출범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겁니다. 주변에서 재능이 아까우니 마지막 기회인 셈 치고 참여를 하라고 성화였어요. 그래서 아내와 약속을 했죠. 선발전에서 떨어지면 화물차를 몰겠다고요. 내심 탐탁지 않았던 아내도 마지못해 허락을 해줬습니다.”

마침 PBA가 출범한 2019년 초 그는 본명인 최경영을 최원준으로 개명했다. 그동안 인생에서 꼬이는 일이 반복되자 지인의 권유로 큰 결심을 내린 것이다.

개명 후 ‘트라이 아웃’을 통해 당당하게 PBA 1부 리그 진출에 성공한 최원준은 막상 경기를 치르면서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좀 더 노력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원년 3차 대회인 ‘웰컴저축은행 웰뱅 PBA챔피언십’에서 정경섭 선수를 꺾고 우승상금 1억원의 주인공이 됐다. 무명 선수의 반란이었다.

“첫 우승할 때만 해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누구와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죠. 왜냐면 외국인 선수들이 누구인지 전혀 정보가 없었을 정도로 무지했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 선수들에 대한 정보가 입력되면서 정상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부담감이 커진 것이죠.”

우승 직후 큐 후원 계약을 맺는 등 탄탄대로가 열릴 듯했다. 하지만 바뀐 큐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기나긴 부진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바꾼 큐를 원망했고 나중에는 결국 자신을 책망했다. 공황장애 증상이 올 정도로 건강도 심각해졌다.

“큐에 적응하지 못해 성적이 바닥을 헤매자 공황장애가 왔던 것 같아요. 큐 후원사에 미안한 감정과 왜 성적이 나지 않는지 불안한 감정 등이 마구 섞이면서 심신이 무너진 거죠. 반짝 우승이라는 비아냥도 힘들었고요. 자다가도 혼자 소리를 지르거나 귀에서 소리가 나는 등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했어요.”

큐 적응 실패로 3년간 바닥권
심리상담 이후 공황장애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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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당구 선수 최원준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나락으로 떨어지던 최원준을 일으켜 세운 힘은 ‘멘탈’ 관리였다. 그가 일하는 경기도 동탄시 ‘캐롬83’ 당구클럽의 지인이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소개해줬다. 두 번째 우승 3개월 전 무렵이었다.

“교수님께 마음속에 담아뒀던 모든 고민을 풀어냈더니 한 말씀을 던지셨어요.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이목을 무시하고 제가 하던 방식과 생각을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좋다’라고요. 신기하게도 그 말씀을 듣자 모든 고민이 사라졌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될 것을 왜 고민하고 있지? 뭐 이런 식이었죠.”

돌이켜보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큐를 교체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탈출구가 됐다. 최원준은 지난 1월 장기계약을 맺은 큐 후원사에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뒤 계약을 해지하고 자신한테 맞는 큐를 장착했다. 큐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자 예전의 실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최원준은 부진의 긴 터널을 벗어나 다시 PBA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 과정을 걷는 동안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거듭 내비쳤다.

“후원사인 엔지엘의 백충종 대표, 천년초마을 김정국 대표, 캐롬83의 신 사장, 배 사장, 은 실장과 티를 내지 않고 후원을 아끼지 않는 안산가브리엘클럽 황성운 사장 등 일일이 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분의 도움이 지금의 저를 뒷받침해 줬습니다. 그리고 항상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의 존재는 든든한 버팀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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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당구 선수 최원준이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이혜영 기자)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