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산업의 결합 의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지위·스타일을 차별화

최근 패션과 미술의 적극적인 대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각기 상이한 역사 속에 발전한 두 장르가 왜 밀애를 나누는 관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본 글에서는 패션과 미술이 어떻게 서로의 상상력을 나누며 성장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샤넬의 글을 음미해보자. 패션이란 옷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과 생각 속에 있다는 말. 이 한마디에 패션이 가진 사회적 구성물의 운명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패션은 신체 위에 걸치는 외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속 일원인 우리 자신의 정체성, 심리, 예법, 지위, 라이프 스타일 모두를 망라하는 기호이자 정신적 형상을 찍어내는 거푸집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패션과 미술은 당대의 이상적인 신체의 미를 재현하는 주요한 매개다. 과거 미술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 회화는 2차원의 평면에 신체를 재현했다면 패션은 신체라는 3차원의 형태에 입체감을 부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패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세 말기부터 복식은 인간의 차별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다만 현대는 패션의 생산과 유통이 대규모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인 만큼 차별화를 위한 노력이 더욱 어렵다. 연간 시장규모가 157조원에 달하는 명품 산업은 유래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위기의식으로 흔들린다.

기존의 패션언어로는 더 이상 럭셔리의 환상을 창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머스트 해브 핸드백은 중국산일 가능성이 높은 시대에 살고 있다. 오죽하면 저널리스트들이 이러한 상품을 가리켜 ‘맥도날드 햄버거’에 비유해 ‘맥럭셔리’라 부르겠는가. 패션과 미술의 만남에는 이러한 자본과 패션산업의 딜레마가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패션산업의 위기감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상주의 작품 속 여인들이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는 것은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한 의류산업과 패션 저널리즘의 결과물이다.

수공업으로 이루어졌던 레이스 산업이 재봉틀의 발명과 더불어 성장하고 인공 염색 기술의 발달로 이전 시대에는 선보이지 못했던 오렌지, 보라색 등 다양한 컬러의 옷이 등장할 수 있었다. 르누아르가 1879년 발행된 ‘모던 라이프’지의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예를 들어보자, 신인상주의 화가 쇠라가 그린 ‘그랑자트 섬의 오후’는 당시 패션의 대중화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료다. 그랑자트 섬은 당시 부르주아들이 투자한 신흥 베드타운이었다. 19세기 말 파리사회는 시골에서 유입된 인구의 증가, 백화점과 같은 유통산업의 발흥, 신흥 부르주아계층의 약진으로 기존 계층체계는 약화되었다.

귀족부인이나 착용이 가능했던 화려한 의상과 액세서리는 패션산업의 발전에 힘입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사무직 임금 노동자로 자리잡은 소시민층은 귀족사회의 화려함을 모방하기 위해 다양한 유흥과 오락에 열을 올렸고, 당연히 여러 계층이 함께 뒤섞이는 현상이 보편화된다. 쇠라의 그림 속 여인들의 패션이 하나같이 독특한 것 없이 유사한 실루엣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근대사회 속 패션의 <평균화 효과>에 다름 아니다.

5. 심플한 고대 그리스 풍의 슈미즈룩
6. 빅토리아시대의 의상.
7. 빅토리아시대의 의상을 실물로 재현한 것

개별화 보다는 집단적 행동으로서의 유행을 따르고, 익명성이 도사리는 사회의 기호로서 패션이 등장하게 된 시대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패션이 더 이상 계급차별화의 힘을 상실하고 대중의 모방에 의한 복식의 민주화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패션의 역사는 결코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다. 패션이 미술의 힘을 빌려, 장르간의 경계를 허물며 하나밖에 없는 미술 작품을 원용하여 패션 상품을 만드는 것은 옷의 민주화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패션의 대중화에 맞서 예술의 기치를 올렸던 사회 개혁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예술 공예운동은 고대에서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영역이었던 패션을 다시 한번 예술의 힘으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산업화를 통한 대량생산이 사회 공동체를 파괴시킨다고 믿었고, 인간의 감성과 손의 느낌이 우러나오는 제품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은 당시 라파엘 전파에게 연결되어 복식개혁운동으로 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패션의 역사는 옷을 예술과 산업의 산물로 규정하고 어디에 더 힘을 실어주는 가에 따라 변모한 역사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는 예술의 산물로 이후 바로크와 로코코, 신고전과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철저하게 생산자의 입장에서 규정되었던 패션이 현대에 와서는 철저하게 두 가지 입장이 결합되면서 제 3의 소통을 시작한다. 과거의 패션요소와 상상력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육체의 그릇에 담아내고 화가와 함께 시대의 격자 무늬를 그려나간다.

로코코 시대의 복식과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 초상화에서, 현대식 이브닝 드레스가 재탄생하고, 신고전주의 시대의 그리스풍 의상에서 오늘날의 심플한 시스루(See-through) 룩과 슈미즈 룩이 만들어졌다. 특히 1920년대부터 시작된 오뜨 쿠튀르의 발전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미술과 더욱 친밀하게 교류하는 밑받침이 되었다.

1920년대 추상표현주의가 득세하면서 신체를 규정하는 시각이 선에서 면으로 이동했고, 신체를 해방시키는 기능성을 살린 옷으로 해석하는 것은 디자이너들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코코 샤넬이 당시 기능주의 건축과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박스형태의 실루엣 의상에 녹여낸 것은 자연스런 결과인 셈이다. 이후 이브 생 로랑이 몬드리안의 그림 속 격자무늬를 드레스에 되살린 것은 1965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다. 19세기 중반부터 도입된 일본의 기모노는 당시 귀족 여성들의 실내복으로 사용되면서 신체의 자유에 대한 의식적인 각성을 이룬다. 동시에 터키풍 할렘바지가 유행하면서 드디어 여성들은 코르셋과 결별했다.

(2003년 장 폴 골티에의 드레스는 키네틱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여성의 신체를 더욱 자유롭게 확장하는데 주력했다) 동양풍의 의상들은 로맨티시즘 의상의 대표주자가 되어 여전히 패션쇼에 등장하는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2008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영국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의 작품은 구스타브 클림트의 그림과 기모노에서 생각을 차용한 것들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거는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현재란 실체에 옷을 입힌다.

코코 시대를 복식에 새롭게 재해석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황색 드레스에는 로코코의 교태와 극도의 우아미가 녹아 있다. 여성의 신체를 마치 조각 낸 초콜릿처럼 녹여먹을 수 있는 물체로 환원했다.

1960년대 팝 아트와 옵 아트의 등장은 패션의 언어를 더욱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만들면서도, 대량생산된 패션의 이미지에 대해 성찰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그림은 종이로 만든 드레스로 변모하면서 소비사회의 예술의 일회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패션은 이후로도 미술의 다양한 접근법을 차용하면서, 디자이너 특유의 미감을 실현한다. 최근 이러한 경향들이 더욱 가속화 되었을 뿐이다.

일본의 팝 아티스트 요시모토 나라는 미국 근대미술관의 아트 상품을 디자인하고, 그라피티(Graffiti: 낙서)를 예술의 장르로 승화시킨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는 리복(Reebok)에서 나오는 농구화에 열심히 낙서를 하고 있다. 그것도 고가의 한정판 에디션으로 말이다. 팝 아티스트 키스 헤링은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와 역동적으로 뛰어다니는 자신의 인간 군상 그림을 운동화 디자인에 적용했다.

그는 고급미술관 저급미술 사이에 존재하는 웃기지도 않은 갈등을 작업을 통해 허물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회를 밝혔다. 손을 잡고 미술과 패션의 공고한 결탁, 수렴현상은 더욱 강해질 것이라 예측된다. 대량으로 찍어낸 옷이 아닌, 세상에 단 한 벌 뿐인 옷을 추구하는 신 귀족 사회.

우리 시대의 패션은 심미화된 소비자로 가득한 우리시대의 편린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가진 자의 부를 한정판이란 이름으로 유혹하려는 산업의 교묘함을 보여준다. 그러니 세상의 멋쟁이들은 미술의 바다를 유영할 때 특히 조심할 것. 그들이 만든 드레스를 예술처럼 입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결국 자본 없이 작품 앞에 다가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글: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 film-, <샤넬 미술관에 가다> 저자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