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테이스팅 인 서울'레드와인 10개 브랜드 전문가 45명 시음 칠레와인 3-2로 아쉬운 판정패

질문 ‘프랑스 와인과 칠레 와인이 한국에서 벌인 결투(?)의 결과는?’

답 ‘프랑스 와인의 판정승! 그렇다고 K.O.승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칠레 와인 입장에서는 결코 기분 나쁘지 않은 아쉬운 3-2 판정패!’

서울에서 세계 와인의 ‘두 강자’가 ‘때 아닌 대결’을 펼쳤다. 둘 사이에 최근 벌어진 전투의 이름은 ‘베를린 테이스팅 인 서울(2008 Berlin Tasting in Seoul). 구대륙의 절대 강자인 프랑스 와인과 신대륙의 와인 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칠레 와인들을 한 자리에 가져 다 놓고 ‘눈을 가린 채’ 맛 만으로 평가를 하는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 대결이다.

두 나라의 와인 맛을 평가하기 위해 동원된 와인은 레드 와인 한 종류에 모두 10개 브랜드. ‘싸움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칠레 와인 5가지, 프랑스 와인 3개에 이탈리아 와인도 2가지가 추가됐다.

이들 10가지 와인은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프리미엄 와인이라 불릴 수 있는 브랜드로만 구성돼 가히 ‘별들의 대결’이라 해도 손색 없는 수준. 프랑스 5대 와인으로도 속하는 샤또 마고와 라피트, 무똥에다 이탈리아의 고급 와인 티냐넬로, 사시카차도 합류했다.

이에 맞서는 칠레 측에서는 역사 깊은 와이너리 에라쥬리즈(Errazuriz)의 프리미엄급 와인들이 총동원됐다.

이번 대결의 심판자는 45명의 국내 와인 전문가. 국내 최정상급 호텔과 레스토랑의 소믈리에, 와인 업계 관계자, 와인 칼럼니스트 등으로 구성된 ‘심판진’은 모두 글라스에 와인이 이미 따라져 있고 번호만 매겨져 있는 상태에서 오로지 맛 만으로 평가를 내렸다.

결과는 1등 샤또 마고 2004 레드 와인. 2등 샤또 라피트 2004. 놀랍게도 금메달과 은메달을 모두 프랑스 명품 와인이 차지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동메달 격인 3등에 칠레 와인인 돈막시미아노 2004가 올랐다는 것. 1, 2등을 놓쳤다고 완패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세계 명품 와인들을 상대로 한 경쟁에서 ‘무려’ 3등에나 오른 것이란 점에서 충격적이라 할 수도 있다.

베를린 테이스팅 인 서울에 참가한 와인 전문가들이 와인들을 시음하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연합군’에 대항한 칠레 와인의 선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4등은 이탈리아 와인 티냐넬로 2004에 자리를 내줬지만 돈막시미아노 2005가 샤또 무통로칠드와 함께 나란히 공동 5위를 거두는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돈막시미아노가 3위에 랭크됐다는 사실은 칠레 와인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서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와이니즈와 함께 이 행사를 주최한 에라쥬리즈의 오너인 에두아르도 채드윅 회장은 “칠레 와인이 프랑스 와인 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이제 옛 말”이라며 “동메달 획득이 무척 고무적이다”고 자평했다.

칠레 와인과 프랑스 등 다른 나라 와인들 간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결 구도로 벌어지는 베를린 테이스팅은 사실 1976년 열린 ‘파리의 심판’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해 5월 24일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인 스티븐 수퍼리어가 와인테이스팅을 열었는데 이 때는 라벨을 가린 채 프랑스와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들을 마신 뒤 맛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프랑스의 와인전문가 9명이 매긴 점수를 종합한 결과 드러난 1위는 까베르네 쏘비뇽 품종의 캘리포니아의 스택스립 와인셀러즈 1973년산. 이 때 행사에 참석했던 미국 타임지 기자에 의해 기사화 된 이 행사는 일명 '파리의 심판'이라 일컬어진다. 당시 전세계 와인업계를 들썩이게 만든 ‘획기적인’ 이벤트이기도 하다.

베를린 테이스팅 역시 ‘파리의 심판’을 주도했던 스티븐 수퍼리어도 함께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주최자가 에라주리쯔의 회장, 에두아르도 채드윅으로 바뀌었다.

채드윅 회장은 2004년 독일 베를린에서 프랑스의 특등급 와인, 이태리의 슈퍼 토스카나, 칠레 와인을 한자리에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벌였다. 결과는 예상 외로 칠레 와인의 ‘압승’. 평론가들 사이에서 비네도 채드윅 2000이 1위에 올랐고 2위 역시 그의 와인 브랜드인 세냐 2001이 차지했다. 3위에 샤또 라피트 2000이 올라 그나마 프랑스 와인이 체면을 유지했을 정도.

이를 통해 에라주리쯔는 세계적인 와인들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티븐 스퍼리어가 참여하면서 '또다른 파리의 심판'이라 불리는 이 시음회 역시 지금까지 칠레 와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테이스팅 이벤트로 자리매김돼 있다.

이 후 베를린 테이스팅은 해 마다 국가와 도시를 옮겨가며 열리고 있다. 2005년에는 브라질, 2006년과 2007년에는 도쿄와 토론토 테이스팅에 이어 마침내 올 해 한국을 찾아 온 것.

“한국 와인 평론가들의 수준에 무척 놀랐습니다. 칠레 와인과 칠레가 아닌 다른 나라의 와인을 절묘하게 구별해 내는 정도로 무척 예민한 입맛을 갖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와인잡지 디캔터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수퍼리어씨는 “무엇 보다 이 행사는 순위를 매기거나 우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칠레 와인이 세계적 와인 생산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맛으로 입증하고 알리려는 목적이다”고 강조했다.

실제 비슷한 시기 같은 형식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이뤄진 베를린 테이스팅 결과는 또한 서울과 전혀 딴판이다. 칠레산 와인인 돈막시미아노 2005 1등, 돈막시미아노 2004가 2등을 나란히 차지한 것. 3위 역시 예상외로 이탈리아 와인인 사시카차가 올랐고 프랑스 와인의 대표격인 무똥과 라피트, 마고 등은 모두 5위 아래로 처지는 뜻밖의 결과가 발생했다.

각각 순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연속된 베를린 테이스팅을 통해 칠레 와인이 거두는 성과는 세계 반열에 오를 만큼 프리미엄 와인이라는 홍보 효과로 정리된다. 비록 1, 2위를 차지하지는 못하더라도 당당히 맞서 비슷한 순위에 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재 가치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행사를 진행했던 와이니즈의 김지혜 기자는 “칠레 와인이 더 좋다 나쁘다를 떠나 칠레 와인의 브랜드 인지도가 이벤트를 통해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고 풀이한다. 실제 주최측이 서울과 베이징의 다른 결과에 전혀 희비가 엇갈리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결국 같은 맥락.

그렇다고 비교 대상이 된 프랑스 와인이라고 사실상 손해 보는 것도 없다는 지적이다. 워낙에 오랜 역사와 공고히 다져온 브랜드 가치에다 이들 명품 와인은 출시되자마자 물량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팔려 나가는 현실에서 전혀 바뀌는 것이 없어서다. 오히려 대결 구도가 명성을 더 키워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고.

수퍼리어씨는 “파리의 심판 때도 미국 와인을 알리는데 주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베를린 테이스팅 역시 칠레 와인을 소개하는 데 의의가 있다”며 “좋은 와인이 있으면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자 소임”이라고 힘줘 말했다.


글ㆍ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