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가 써내려간 자기 이력서채무관계 속이해·소통, 단조로운 서사 연기력으로 극복

지금은 가장 인세를 많이 낸 작가로 자리를 잡은 소설가 김훈은 등단 이전에는 한국의 위대한 산문가로 장기집권 한 바 있다.

산문이 저명한 소설가나 시인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에 기자이며 문학평론가 직함과 자전거 레이서였던 김훈은 작가들의 산문을 무색하게 만드는 인물 중에서 으뜸이었다. 그의 산문은 한 단락에 한 구절 정도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명문을 심어놓았으며 조금 길게 쓴 시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시적 감수성과 탁월한 직관으로 충만했다.

그의 산문집 서문에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 살아간다’는 구절이 있다. 필자는 카뮈가 쓴 장 그르니에 <섬>의 발문과 함께 이 서문을 애독했다.

그리고 몇 문장 뒤에 단도직입적으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이다고 확인사살했다. 상처는 아프지만 늘 아름다움을 잉태하는 모태다.

지각하는 여고생부터 양로원에서 화투장을 넘기고 있는 할머니에 이르기 까지 각자 운명이 부여한 상처는 공동 소유하고 있다. 상처는 그 자체로 인간의 행복도 불행도 결정짓지 못하지만 상처에 대한 저항력의 편차에 따라 흔들리기도 하고 당당하게 맞서기도 한다.

악이 선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주는 항생제인 것처럼 상처는 불행과 고통에 대한 항체 배양소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상처는 이야기를 끌고가는 원인제공을 하며 상처와 관계를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영웅도 되고 살인마도 된다. 영웅에게 상처는 더 큰 성장을 위한 자극제이며 살인마에게 상처는 피를 부르는 피리 소리와 같다.

이윤기의 <멋진 하루>는 채무자와 채권자가 만나서 채무이행을 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맥거핀과 같은 속임수 일뿐 정작 방점을 찍은 것은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청산하는 양해각서를 쓰거나 각자의 상처를 모두 드러낸 다음 깊이 있는 소통과 감정의 질그릇을 빚어낸다.

두 남녀가 공통으로 겪은 이혼의 상처와 배반의 상처는 이미 그들의 삶을 뒤흔들지 못하고 하나의 풍경으로만 자리한다. 상처는 그들이 행하는 채무이행이라는 행위의 수면 밑에 자리하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감정의 오르내림을 만들어내는 균형추다.

희수(전도연 역)는 병운(하정우 역)에게 350만원을 받기위해 경마장에 찾아오며 빈털터리 병운은 주변의 여성들로부터 푼돈을 차용하여 부채를 탕감하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희수가 경마장으로 들어가기 전 병운의 친구인 두 남녀의 대사가 나오고 경마장 옆을 지나가는 두 행인이 지나간 다음 프레임에 남은 여자, 희수가 경마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이 영화의 서사 방식을 압축해준다. 희수의 정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두 명의 엑스트라와 대사와 행위가 먼저 제시된다.

두 배우는 희수를 드러내기 위한 속임수이며 동시에 영화 속의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희수가 병운에게 350만원을 돌려받는 채무이행이 영화의 중심 서사 이지만 정작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것은 상호 감정의 잔액과 부채감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두 인물은 부채상황이라는 풍경 아래 모두 각자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있었으며 서로 대화를 통해 내밀한 상호 이해와 소통의 지점에서 교감하게 된다.

희수는 병운을 도와주는 여성들과 사촌이 던지는 대사로 병운이라는 퍼즐의 정체성을 알게된다. 이 과정은 남녀가 오해와 갈등에서 이해와 화해로 이행해간다는 점에서 멜로 드라마적이다.

병운은 그를 도와줄 여성들을 만나고 이를 지켜보는 희수는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전도연은 표정과 시선 연기로 희수의 감정을 프레임에 채워넣어 연기력을 과시한다. 하정우는 자신의 불행과 현재 상황을 외면하고 명랑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해야할 임무인 채무이행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캐릭터를 무리 없이 소화한다. 두 배우의 연기력은 이 작품의 단조로운 서사가 주는 지루함을 완화시켜준다.

가장 압권은 병운이 여성사업가에게 돈을 빌리는 장면이다. 병운은 골프치는 오여사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이를 지켜보는 희수는 대출을 위해 자기를 파는 그의 행동이 눈에 거슬린다.

이 장면은 희수의 표정과 병운의 행동을 교차하여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냈다. 100만원을 대출한 다음 병운은 희수의 차에서 가져온 초콜렛을 여성사업가에게 선물까지 한다. 이 장면은 두 남녀의 캐릭터와 대표적인 갈등 지점을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윤기 감독은 <여자, 정혜>(2004)와<러브토크(Love Talk)>(2005) 그리고 <아주 특별한 손님>(2006)이라는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세 편의 영화는 옴니버스로 된 한편의 영화처럼 구조와 주제, 출연 배우까지 유사하다. <멋진 하루> 역시 전작에 등장한 김중기와 김혜옥과 기주봉과 한효주가 작은 배역으로 등장하여 이윤기 감독이 만들고 있는 연작 영화의 한 편 같다.

영화 평론가 김시무는 기존의 세 작품을 평가하면서 “하나 하나 떼어 놓고 보면 어딘가 좀 미완성인 듯 보이지만 이처럼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면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삼부작”이라고 했다. 이윤기의 작품에 대해 ‘부산 앞바다에서 건진 진주’라고 상찬했다. <멋진 하루>는 이윤기의 연작이 현재 진행형임을 공표한 작품이며 동시에 2008년 주목할 만한 한국 영화의 목록에 기입될 영화가 될 것 같다.



문학산 부산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