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품에 큰 세금감면, 경기부양 탈을 쓴 부자 배불리기

특소세 인하는 미국 입맛 맞추기

고가품에 큰 세금감면, 경기부양 탈을 쓴 부자 배불리기

“자동차 특별소비세는 한ㆍ미 자동차 협정에 따라 연내 조정하도록 돼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PDP TV 등 고가 가전제품도 이미 낮은 탄력세율이 적용되고 있어 인하 시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6월 초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한나라당의 감세 방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특소세 인하 등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고 몇 차례 밝힌 데 이어 다시 한번 당분간 특소세를 인하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불과 1개월 뒤. 김 부총리의 발언은 180도 뒤집어 졌다. 자동차는 물론 PDP TV와 에어컨 등 가전 제품의 특소세가 동시에 인하됐다. 경제 수장의 말만 믿고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가슴을 쳤다. “관료의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헌데 정부와 국회가 내린 결론은 서민들을 더욱 허탈하게 했다. 수입 외제차의 세금 감면 혜택은 1,000만원에 육박하는데 소형차 감면액은 기껏해야 20만~30만원에 불과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잘 팔린다는, 1,000만원을 넘나드는 고급 가전 제품의 특소세는 왜 인하를 하는 건지.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건지, 부유층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건지. 특소세 인하를 기다리며 소형차 구입을 미뤄온 회사원 강정명(29)씨는 “자동차 대리점에 문의해 보니 구입하려는 차의 인하 폭은 고작 20만원에 불과했다”며 “경기 부양이라는 것이 결국은 미국과 부자들의 배만 불리는 격”이라고 푸념했다.


미국 입김에 춤추는 자동차 특소세

지난해 11월. 자동차 업계는 레저용 픽업트럭 차량에 대한 특소세 부과 여부를 놓고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발단은 쌍용차가 출시한 레저용 픽업트럭 ‘무쏘스포츠’의 차종에 대해 국세청이 재경부에 유권 해석을 의뢰하면서부터 였다. 적재 중량 등 형식 요건만 충족하면 화물차로 분류하는 자동차관리법(건설교통부)과 용도에 따라 차종을 결정하는 특소세법(재경부)이 정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화물차로 분류될 경우 특소세가 완전 면세되지만, 승용차로 분류될 경우 300만~400만원의 특소세를 물어야 하는 판이었다. 재경부는 단호했다. 쌍용차와 고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며칠 뒤 “‘무쏘스포츠’는 화물보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용도에 더 적합하다”며 승용차로 분류, 14%의 특소세 부과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 문제가 통상 분야로 비화하면서 사태는 반전됐다. 미국측이 유사한 사양과 제원의 ‘다코타’(다임러크라이슬러)를 승용차로 분류해 특소세로 부과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제동을 건 것.

미국측이 ‘한ㆍ미 통상현안 점검회의’에 주요 의제로 올려 놓고 한국 정부에 으름장을 놓았고, 정부는 제대로 저항조차 못해보고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었다. 법 개정을 통해 레저용 픽업트럭을 다시 화물차로 분류하고 특소세 부과 방침을 전면 철회한 것이었다. 불과 1개월여만이었다. 미국 입김에 오락가락한 정부 정책 탓에 골탕을 먹은 것은 ‘무쏘스포츠’를 구입한 소비자들이었다.

당시 자동차 업계 한 관계자는 이렇게 푸념했다. “법도 원칙도 없다. 미국의 말 한마디에 우리나라 조세 정책이 좌지우지된다. 조세 주권이 완전히 유린당했다.” 자동차 특소세는 미국 세금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형차 특소세 부과는 미국 탓

자동차 특소세 인하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산업자원부는 면세점 상향 조정 방안을 국회 등에 요청했다. 현재 800㏄ 미만 경차에 대해 적용하던 면세점을 1,600㏄로 상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자부 관계자는 “민주당이 마련한 특소세율 인하 방안의 경우 서민 혜택이 미흡해 세제 역진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모처럼 서민 편에 선 한나라당 역시 1,500㏄ 이하 소형차에 대한 특소세 폐지를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이제는 생활 필수품이 된 소형차에 다른 사치품과 동일하게 특소세를 부과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넘어야 할 벽은 미국이었다. 미국측은 일찌감치 수입차와의 형평성을 해칠 수 있다며 면세점 상향 조정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혀 온 터였다. 재경부는 제대로 대응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산자부와 한나라당 안을 묵살했다. 재경부는 국회 재경위 예산안심사소위에서 “소형차 특소세 비과세 시 통상 마찰의 소지가 있으며 미국측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신 ‘한ㆍ미 자동차 협정’에 따른 미국측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해 3단계 특소세율 부과 기준을 2단계로 하향 조정하는 방안을 택했다. 미국측은 3단계 대신 2단계 분류를 택할 경우 대형차 위주의 수입차 가격 정책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결국 2,000㏄ 초과 14%, 1,500~2000㏄ 10%, 1,500㏄ 이하 7%로 나뉘어졌던 특소세 부과 기준은 2,000㏄ 초과 10%, 2,000㏄ 이하는 5%로 조정됐다. 수입차를 비롯한 대형차는 4%포인트의 특소세 인하 효과를 본 반면, 특소세 면세를 주장했던 소형차는 불과 2%포인트 인하 혜택밖에는 보지 못한 것이다. 소형차 특소세 인하 폭이 당초 정부안(1% 포인트)보다 다소 높아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특소세 인하 서민에겐 '그림의 떡'

이번 특소세 인하 조치로 소형차인 현대차 뉴베르나 1.5GV의 가격 인하폭은 25만원 가량. 기존 1,033만원에서 1,008만원으로 떨어졌다. 준중형인 SM3(삼성르노)나 뉴아반떼XD(현대차) 역시 가격 하락 폭은 29만~31만원에 불과했다. 특소세 인하 이후로 구입 시기를 늦춰 왔던 서민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현대차 대리점 한 관계자는 “특소세 인하 이후 그동안 대기하고 있던 물량의 주문이 몰려드는 것 외에 신규 주문은 기대보다 많지 않다”며 “1,000만원 짜리 차량 가격이 20만원 가량 줄어든다고 해서 얼마나 수요가 늘어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대형차 시장은 사정이 다르다. 뉴그랜저XG의 경우 2,865만원에서 2,739만원으로 126만원, 에쿠스 JS350은 5,815만원에서 5,559만원으로 무려 256만원이나 떨어졌다. 수입차의 인하 효과는 더욱 크다. BMW 745Li는 1억7,200만원에서 1억6,700만원으로 500만원, 벤츠의 최상급 모델인 CL600은 2억7,000만원에서 2억6,050만원으로 무려 950만원이나 내려 갔다. 수입차의 가격 탄력성이 적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외제차를 즐겨 타는 부유층에게는 꽤 매력적인 조건인 셈이다.

프로젝션 TV, PDP TV 등 고가 가전제품의 특소세 인하 역시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만을 조장한다. 이들 제품의 가격은 통상 적게는 200만~3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을 훨씬 상회한다. 서민들은 구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제품들이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고가 가전제품의 가격이 10만~20만원 정도 떨어진다고 해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며 “결국 내수 확대 효과는 없이 제품을 구입하는 부유층들에게 금전적 이득만 안겨주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소세 인하로 경기가 부양되면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고 결국엔 혜택이 서민에게까지 돌아갈 것이다”는 정부의 설명이 너무 궁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영태 기자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