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등에 고급인력 몰리며 '부동산학 열풍' 으로 번져

부동산, 이제는 과학이다

대학 등에 고급인력 몰리며 '부동산학 열풍' 으로 번져

부동산은 감(感)과 운(運)에 의존하는 투기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부동산 관련 정책은 늘 주먹구구 식이었다. 부동산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한참 뒤떨어진 후진국이었다. 적어도 외환 위기 이전까지는 그랬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불과 3~4년 전,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부동산에 눈독을 들이면서부터 였다.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 자금 조달과 개발 방식에 새로운 기법이 도입됐고, 다양한 금융 기법의 접목과 함께 리츠, 주택저당증권(MBS) 등 새 상품들도 속속 등장했다. 부동산이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개발해야 하는 분야로 변화한 것이다.

학문으로서의 부동산도 점점 주목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대학에서 철저히 소외돼 ‘변두리 학문’ ‘학문 아닌 학문’의 대접을 받아왔던 ‘부동산학’에 고급 인력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 지금까지의 ‘부동산 열풍’이 단순히 ‘투기 열풍’을 대체하는 용어였다면, 최근의 ‘부동산학 열풍’은 부동산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새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직 부동산 배우기 열풍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2학기 신입생 모집. 53명 모집에 378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경쟁률 7.13대 1. 합격자 면면도 예사롭지 않다. 변호사 8명, 공인회계사(CPA) 3명, 그리고 세무사와 건축사 감정평가사 각 1명. 전문직 종사자가 20%를 넘는다.

“주식, 채권 등의 상품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고 판단하는데 아직 부동산은 낯선 분야라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A회계법인 J 매니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 않고 경제학을 전공했다. 연수원을 졸업하고 곧 바로 부동산 관련 전문 변호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법연수원생 L씨)

올해로 설립 3년째를 맞은 건대 부동산대학원은 최근 일고 있는 부동산학 열풍의 중심에 서 있다. 건설업계 종사자는 물론 부동산 분야에 특화해 경쟁력을 갖추려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선명법무법인 전우석(37ㆍ사시 37회) 변호사는 “한 부동산시행사의 비상임 이사직을 맡아 일을 하다 보니 주먹구구식 접근으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전문적인 일 처리를 위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측도 부동산대학원의 인기에 잔뜩 고무돼 있다. 이춘섭 부동산대학원장은 “사회적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집중 육성할 계획”이라며 “올 초 전임 교수 2명을 충원한 데 이어 조만간 미국 자격증 시험을 도입하는 것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최고의 유망 학과로 뜬다

현재 국내 대학 중 부동산 관련 학과를 운영하고 있는 곳은 20여곳. 건국대를 비롯해서 한성대, 강원대, 서일대, 전주대 등이 부동산학과를 두고 있다. 특히 최근엔 서울디지털대, 서울사이버대 등에서 부동산학과를 설치했고, 동국대는 최고경영자 단기 과정으로 부동산 전공을 마련하는 등 ‘부동산학 열기 확산’이 급속히 이뤄지는 추세다.

학생들의 반응도 뜨겁다. 강원대의 경우 1978년 지적학과에서 출발해 토지행정학과를 거쳐 96년 부동산학과로 수 차례 명칭을 변경할 정도로 그간 학교 내에서 찬 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 사실. 행정-부동산학과군으로 신입생을 모집해 2학년 때 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늘 행정학과에 밀렸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올 2월 졸업한 부동산학과 학생들의 경우 건설업체와 시행사, 관공서 등에 100% 취업하는 등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수요가 넘쳐 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 김 숙 조교는 “부동산학과라는 명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사회과학대 학과군 중 가장 경쟁률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학부(정치대학) 단위로 신입생을 모집해 2학년 때 과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는 건국대 역시 비슷한 상황. 정치대학 내 3개 학과 중 최근 들어 정치학과 행정학과 등 전통적인 학과에 비해 부동산학과가 압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성대 부동산학과 민태욱 교수는 부동산학과의 인기 비결을 이렇게 진단했다. “건축공학과 등 건설과 관련한 학문이나 공인중개사 같은 지극히 실무적인 공부와는 달리 부동산학과는 가장 원론적인 내용에서부터 아주 실무적인 것까지 총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선진 기법 도입으로 학문 영역도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특히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이 최고의 재테크 수단이라는 점이 학생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다.”


해외 부동산 학위 도전자도 급증

부동산 MBA(경영대학원 석사)라고도 불리는 MRED(Master of Real Estate Development) 학위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MRED는 부동산이론과 금융, 자산관리 등을 결합한 2년 짜리 전문가 석사 코스. 캘리포니아대(USC), UC버클리, 하버드대, MIT, 코넬대 등 미국 유수 10여개 대학에 개설돼 있다. 국내 대학의 부동산학이 다소 원론에 치우쳐 있다면, MRED는 실무 양성에 보다 주력한다.

부동산 자산 관리 회사인 코리아에셋어드바이저즈(KAA) 자산관리팀장으로 있는 양미아(34)씨는 아직 국내에서 몇 안 되는 MRED 학위 소지자 중 한 명. 미 USC대에서 도시계획 석사 학위를 받은 뒤 98년 곧 바로 MRED 학위에 도전했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야였지만 미국에서는 MBA 보다도 더 대접을 받는 분야였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현재 맡고 있는 일은 서울 역삼동 로담코타워와 한솔빌딩, 연지동 은석빌딩 등 서울 시내 대형 빌딩을 위탁 관리하는 업무. 건물주의 재산을 위탁받아 예산 편성에서부터 수익 분석, 법적 문제 해결 등 총체적인 관리를 하는 일이다. 그녀는 “과거처럼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를 해서는 운영이 불가능한 시대다.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현재 국내의 MRED 학위 소지자는 50명 미만. 하지만 학위가 국내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최근 1~2년 동안 MRED에 도전하려는 이들도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S건설사에 근무중인 김모(35)씨는 최근 코넬대로부터 입학 허가서를 받아놓은 상태.

김씨는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부동산이라는 단어만 사용돼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선진 부동산 기법을 체계적으로 배워 국내 부동산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분별한 부동산학 열풍에 대한 조심스러운 견해도 있다.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 만큼 부동산 관련 시장이 발전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미아씨는 “아직 국내에서 부동산학은 초기 단계인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좁은 국토 탓에 성장에 한계가 분명히 있는 만큼 도전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영태 기자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