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에게 듣는다] 진교훈 서울대교수



"삶의 제1의 가치는 윤리여야"

'철학의 문으로 들어가 의학을 만나고, 생명의 품에 안착하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 그리고 지식인 사회 특유의 뒤통수 치기 수법을 당해 비뚤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들이 닥쳤던 모든 일들을,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하고 자신의 대명제로 승화시켰다. 바로 '사람다움'이다. 선생이 추구해 온 필생의 테마인 윤리라 해도 좋다.

후둑후둑 퍼붓는 빗줄기가 관악골에 가을이 깊어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종이 한장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같은 10월 1이 서울대 명예 교수 연구실에서 진교훈(66·서울대 사범대 국민윤리교수)선생이 내미는 손에서는 온기와 힘이 전달돼 있다. 형형한 안광은 여전히 현장을 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징표이리라.

"매일 이렇게 연구실에 나와 기고문을 쓰거나, 강연회 준비로 바쁘죠." 최근 선생의 자취를 ?거해 보면 금방 와 닿는 말이다. 초청을 받고 행했던 일련의 강의는 제목만 보아도 묵직한 중량감으로 다가 온다.

9월25일 광운대에서의 '장기 이식의 문제와 현황'(생명윤리학회 주최). 26일 서울대 컨벤션 센터에서의 '효도법 제정을 위한 효 교육'(효학회), 28일 가톨릭 청소년회관에서의 '죽음의 문화로부터 생명의 문화로'(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등.

연내로 남겨진 계획 중 굵직한 것만 건져보자. 11월15일 '환경 윤리와 전통 사상'(경기대 개교 기념), 11월28일 '생명의 존엄성'(가톨릭대 법률연구소 개설 기념), 12월3~5일 '생명 윤리의 문화적 양상(독일 학술 재단 주최) 등. 세계 24개국에서 초청 받은 학자들이 생명이란 대주제 아래 벌일 이 심포지엄에서 한국 학자로 참석하는 사람은 선생뿐이다.


철학과 인간의 연결고리는 윤리

현대 철학은 갈수록 난해해져 간다. 보통 사람들의 삶과 더욱 괴리돼 간다. 기호나 개념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어 웬만해서는 접근할 엄두조차 못 낸다. 철학이 과학의 옷을 입고 정확한 인식을 추구해 가는 우리 시대, 선생은 이 시대에도 철학은 여전히 인간을 위한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그 연결 고리가 바로 윤리학이다.

3월2일 정년 퇴임식을 가진 선생에게 일부 언론은 전면 인터뷰 기사를 실어 '인간의 모습을 한 철학'에 열정을 바친 선생의 삶을 부각시켰다. 6월24일 제자들은 퇴임기념 논문 봉정식을 마련했다. 그날 선생은 '윤리학 연구의 기본 방향'이라는 제하로 고별 강연을 해 고마움의 뜻을 대신했다.

백화점식 기념 논문집을 반대해 온 선생은 '서양의 근세·현대 윤리학'(과학교육사刊)으로 정리해 내더니, '현대사회 윤리 연구'(인간사랑刊)로 논의를 심화했다.

윤리학이란 삶과 세계에서 무엇이 가치있는가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그 정점에서 선생이 생명과 조우한 것은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다. 2002연 빛을 본 '의학적 인간학'(서울대출판부)은 첫 열매였다. 2000년 빈 대학 철학과 교환 교수로 가서 연구한 결과이다. 그 책을 계기로 국내에는 '의학적 철학'이란 말이 낯을 트게 됐다.

7월21일자 교수신문에 기고했던 '생명 위협하는 생명산업자들'은 그의 생명 철학이 지향하는 바를 선명히 밝혀준다. 선생의 어조는 다소 격앙돼 있다. 선생은 '인간 배아복제와 이종간 교잡 행위를 금지하는게 마치 난치병 치료 연구와 생명 공학의 발전을 방해나는 것처럼 일부 생명 공학자과 생명산업자가 주장하는 것은 저의가 매우 의심스럽다'며 강력 경고했다.

철학자이면서도 생명 현상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선생의 독특한 인생 행로【?비롯됐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북간도 용정. 부모가 독립 운동가를 따라 간 만주가 고향인 것이다. 감수성 예민한 소년에게 비쳤던 인민재판의 광경은 생을 결정지웠다. "친구 아버지가 친일분자로 내몰리더니, 부녀자들의 의해 식칼에 찔려 죽더군요." 도대체 사는 게 뭔가? 삶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 소년을 사로 잡았다. 인간을 짓누르는 고통의 실체와 원인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 의식이 싹튼 것이다.

38선을 넘어 간 서울서는 6·25를 겪었다. "9·28 수복 직전 아현동 고모집의 안부를 물으러 가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인민군 소년이 네이팜탄에 맞아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걸 봤죠." 밤섬과 말죽거리에서는 호주 비행기가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모습과 맞닥뜨렸다. 도처에 죽음이었다. 종교나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자연스러웠다. 모친을 통해 심훈이나 춘원 등 당대 문필가들의 글도 접했던 터였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같은 톨스토이의 작품으로 밤을 지새기 일쑤였죠." 피난가 있던 부산초량동의 헌 책방을 돌아 다니며 구한 문학과 역사 서적을 밤새워 읽던 중2때였다. 그러다 철학에 빠져든 것은 '문화의 몰락과 재건'등 월간 '사상계'에서 슈바이처에 관한 게재한 글을 접하면서 였다.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求安錄)'. 평화에의 갈망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던 전쟁기에 책은 소년의 영혼을 빨아 들였다. 목사가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종교 철학의 길로 성큼 들어섰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함석헌의 스승이었다. 피난 시절 그는 목회 운동가 조형균씨와 함께 골방에서 우치무라의 책을 번역하다 험석헌의 '뜻으로 본 조선 역사'를 탐독했다.

"철학을 공부한 후 의사가 돼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꿈을 갖게 됐죠."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뒤, 의대의 정신과 강의 또한 열심으로 들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철학에의 시취, 생명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조건은 척박하기만 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의 의절할 결심으로 철학과에 들어가보니, 머물 곳은 교수 연구실 정도였다. 판초 안에 아무리 담요를 쑤셔 넣어 본들 영하 10도를 웃도는 겨울은 견딜 수 없었다. 입주 가정 교사를 하면서 근근히 월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은 4년만에, 그것도 우등생으로 마쳤다. 수업료 면제를 받고, 문리대 장학생 1호라는 기록도 하나 세웠다.

4·19를 철학과 대학원에서, 5·16을 고교 독어 선생으로 있다 맞은 선생은 자원 입대를 한다. 유학 갈 자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1968~72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딴 선생은 다시 같은 대학 의대에 들어가 진작부터 품어 오던 의문에 다가섰다. 병원론(etiology). 질병과 정신의 관계를 구명하는 학문으로, 현대 서양 의학의 맹점을 보완하는 학문이다.

의학에 점점 빠져든 선생은 프랑스에 가서 정신 의학을 공부할 작정이었다. 그런 선생을 불러 들였던 것은 모친의 위독 소식이었다.

1973년 돌아 온 선생은 경희대 철학과 교수로 강의를 시작했다. 대학 시절 조영식 총장의 가정 교사로 아들을 지도했던 게 인연이었다. 현지 유학덕에 독어 실력이 출중했던 선생에게는 전공 밖에도 독어, 라틴어, 미술사, 미학 등의 과목까지 맡겨 졌다. 총장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기념식사를 도맡아 쓰는 등 한때 총장 지근의 인물로 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낭중지추였다.

1975년 인권주간 중 YMCA에서 연좌제와 신원보증제 등 악법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는 공개 강연을 펼쳐 본연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존엄성이 내화두인 만큼, 생각하면 당연할 일이었죠." 게다가 국토 개발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던 환경 문제를 지적하는 등 슬슬 눈엣가시로 비치기 시작했다.(당시 이 글은 철학자가 환경 문제에 대해 쓴 최초의 문건이다.)

학생의 맹휴(동맹휴학)때 학생편에 선 것은 한술 더 뜬 일이었다. 학교측은 1976년 교수재임용 당시 해직으로 선생에게 답했다. 신문 가판에 그 사실이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나를 걱정해주던 사람들은 나더러 총장한테 가서 사과하라고 하더군요."그럴 법 했다. 신문은 물이 뚝뚝 듣는 대장 상태로 검열 받았고, 세간에서는 '대학 교수 중 천당 갈 놈 없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던 때였다.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하던 인간학도 중단됐다. 강의는 카톨릭대와 수녀원 등 종교 관련 대학에서나 가능했다. 당시 선생에게 숨통으 틔운 준 것은 번역 작업이었다. 총장과의 만남을 주선하다 총장으로부터 감정적 대응만을 받았던 숭실대 죠요한 교수가 마련해 준 새로운 호구지책이었다.

국내 최초의 인간학 관련 서적인 '철학적 인간학'이 그래서 빛을 봤다(경문사刊). 숨어 살다시 피하며 신학 강의를 하던 선생이 다시 대학으로 돌아온 것은 1년 뒤였다. 기구한 사연을 경희대의 제자가 신임 황산덕 교육부 장관에게 전달 한 것.


위기의 서양문화, 동양윤리학으로 구해야

여러 대학에서 해직 교수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하던 중 중앙대 문리과 대학 철학과 부교수 자리가 났다. 보직 교수 제의까지 왔으나, 공부를 하고 싶었던 선생은 사양했다. 당시 '중앙대 발적 계획 10개년 사업'에 참여 하라며 거의 협박 수준으로 그를 닥달해 왔다. 이직설이 파다했다. 당시 모 대학 신문은 성마르게 '신임 교수 인터뷰'까지 따 갔다.

서울대가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사립대 차원에서 벌어졌던 일이라, 서울대는 개의치 않아도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수 초빙안을 받아 들인 선생은 1983년부터 국민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해 오고 있다 .선생은 중앙도서관장으로 재직한 1995~1999년의 시간을 특히 꼽았다. 디지털 라이브러리 계획이다.

이를 위해 선생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1시간 독대해 설득과 이해에 공을 들였다. "당초는 3분 면담이었는데, 1시간 동안 이어졌죠." 전자 사업으로 번 돈을 서울대에 풀라는 요지였다. 결국 33억을 약속받았다. "브리핑 안을 3분, 15분, 30분 등 세 가지로 준비했던 게 주효했던 거죠." 1주일 뒤 IMF가 터졌으나 약속은 지켜져 사업은 실행됐다.

선생의 향후 연구는 생명으로 집약된다. 2002년 생명윤리 공학회 회장으로 있으며 생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 왔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생명 윤리 과목을 넣도록 할 계획입니다." 보사부에 책정된 생명 윤리 예산 67억원이 말대로 철저히 윤리적 기반 위에서 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포르노, 엽기 등 죽음의 문화로 막다른 골목에 처한 현대 서양 문물을 이제 효사상 등 동양의 윤리학에서 구해야죠."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자연법의 가능성이란 지적이다.

선생의 부인은 수녀 지망생이었다. 서울대 동기생으로, 사학과 대학원생 1호인 김을영씨다. 건강이 나빠 수녀원 생활을 이겨내지 못해 서울대에 입학했던 부인을 4학년때 '한국철학사' 강의실에서 만난 선생은 종교를 매개로 해 부쩍 가까워 졌다.

"매일 8시에 집을 나와, 9시 연구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들어 와 책을 펼쳐요. 집사람은 아직도 나를 하숙생이라 하죠, 허허허." 가난한 철학자한테 시집 온 여자가 고마울 뿐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0-14 11:51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