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 97년, 그리고 2003년] 삼팔선에 서서 희망을 찾는 당신



'오륙도' '사오정' 이어 '삼팔선'으로 명퇴연령 낮아져

38살의 선택, 또 다른 미래 위한 '도약의 기회' 인식도

평생 직장에 대한 믿음은 하루 아침에 산산 조각이 났다. 십수년을 몸담아온 회사는 차갑다 못해 냉혹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맞은 1997년, 그리고 98년. 하루에도 수백명, 아니 수천명의 직장인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정리 해고라는 험악한 표현 대신 명예 퇴직이라는 고상한 수식어와 함께. 한 명예 퇴직자의 아픔을 담아 낸 제일은행의 ‘눈물의 비디오’는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생생한 기억이다. 그렇게 온 국민은 그들의 아픔에 함께 울었다.

허나 그들의 아픔을 계속 나누기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또한 너무 컸다. 그들이 남기고 간 일은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었고, 이들 또한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를 명예 퇴직의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수억원에 달하는 명퇴금으로 ‘돈 잔치’를 했다는 비판이나, 누구 누구는 명퇴 후 창업을 해서 큰 노력없이 돈 방석에 앉았다더라는 냉소적인 소문이 나돈 것은 아마도 남아있는 이들의 삶이 너무 팍팍한 탓이었을 테다.

택시 운전사로, 식당 종업원으로, 또 일용직 일꾼으로 내몰려야 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잠시 잠시 표출되는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 정도일 뿐이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이 흘렀다.


IMF때보다 더 추운 시절

2003년의 한국 경제는 살얼음 판을 걷고 있다. 금리 인하 등 숱한 군불 때기에도 불구하고 꽁꽁 얼어붙은 내수와 기업들의 투자 심리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각 기관들이 내놓는 성장률 전망은 기껏해야 2%대 안팎일 뿐이다. “IMF 체제 당시 보다 더 심각한 위기 국면”이라는 진단이 결코 엄살만은 아닌 듯하다.

그렇게 다시 6년만에 거센 명예 퇴직 바람이 불어 닥쳤다. KT가 무려 5,500명, 두산중공업이 400명에 가까운 인원에 대해 명예 퇴직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삼성ㆍSK그룹 등 대기업과 우리ㆍ국민은행 등 금융권에도 구조조정의 한파가 서서히 엄습하고 있다.

97년, 그리고 2003년 명예 퇴직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지켜온 회사가 저를 버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평생 한 우물만 파온 저로서는 1억원 남짓한 돈을 들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캄캄했습니다.” (97 명퇴자)

“언젠가는 떠나야 할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는 해왔어요. 어차피 평생 직장이 아닐 다음에야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에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은 것은 아니지만 조그만 창업에 나서 보려구요.”(2003 명퇴자)

예상 외로 너무 담담하다.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를 받았던 97년의 명예퇴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절이나 실의에 빠지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선택에 그다지 후회는 없는 듯하다. 아니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고도 한다.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무엇보다 주목할만한 변화는 명예퇴직자들의 연령이 크게 낮아졌다는 점이다. 이번 명예퇴직 대열에는 40~50대가 아닌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들이 대거 합류했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최근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남성 직장인들이 느끼는 평균 체감 정년 연령은 불과 38.1세였다.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남아 있으면 도둑놈), ‘사오정’(45세 정년)을 넘어 “이제 38세 쯤이되면 명예 퇴직을 선택할 지 여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삼팔선’이라는 얘기까지 나돌 판이다.

이런 현실을 뒤로 3개월 전 한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한 가슴 시린 뉴스가 교차한다.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외환 위기 때 명예 퇴직한 한 은행 지점장이 퇴직 후 정신적 고통을 겪던 중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7월6일 오전 10시께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아파트 안방에서 S은행 전 지점장 장 모(59)씨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장씨는 명문 S대 법대를 졸업하고 S은행 여신기획부를 거쳐 지점장을 지냈으나 명예 퇴직후 성격이 폐쇄적으로 변했고 5년간 매일 소주 3~5병 정도를 마실 정도로 술에 젖어 살았다.

경찰은 알코올 중독에 다른 합병증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이제는 사회에서 거의 잊혀져 간 97년 명예퇴직자 상당수가 그간 겪었던 괴롭고 쓸쓸한 삶의 궤적이다. 과연 2003년 ‘명퇴’는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15 19:00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