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결의안 채택으로 딜레마 벗고 파병 명분 확보

盧 등 떠밀어준 UN
이라크 결의안 채택으로 딜레마 벗고 파병 명분 확보

원래 그렇게 정해진 일이었을까?

유엔 안보리가 만장일치로 대 이라크 결의안을 채택하자 정부는 곧바로 노무현 대통령 주재의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이라크 추가 파병을 전격 결정했다. 파병 규모와 시기 등은 추후 논의키로 했으나 정부는 파병 원칙과 함께 향후 4년에 걸쳐 2억 달러(한화 약 2,3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파병과 관련 신중한 행보를 보이던 정부가 유엔 결의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파병 방침을 결정하자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전체가 또다시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여야 정당 중 자민련은 정부 결정을 즉각 환영하고 나왔지만 한나라, 민주, 통합신당 등 나머지 3당은 뚜렷한 입장 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시민단체들도 두 패로 나뉘어 보수성향의 단체들은 적극 환영으로 반기는 반면,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은 파병 결정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지난 4월 1차 파병 때의 공병ㆍ의료부대와 달리 이번 2차 파병은 전투병 성격의 치안유지군 성격을 띠게 돼 파병 반대론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거센 논란의 와중에 노 대통령은 10월19일 APEC(아태경제협력체)정상회담 참석차 태국으로 출국했다. APEC 회의에 앞서 이뤄질 20일의 한미 정상회담에 앞두고 노 대통령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큼지막한 선물’을 안겨준 셈이다. 그러나 어차피 파병이 정부 차원에서 결정된 만큼 한미 정상회담 등을 통해 대북문제 등 미국으로부터 ‘얻어낼 것은 확실히 얻어내야 한다’는 현실론도 힘을 얻고 있다.

물론 노 대통령이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다. 극렬하게 엇갈린 국내 여론을 수습해야 하고 국회 동의안 통과도 변수로 남아 있다. 만일 이 같은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병력 5,000~1만여명의 규모가 내년 2월께 이라크로 파견될 예정이다. 주둔지는 이라크 북부인 모술과 키르쿠크 지역이 유력하다.


전격 파병 결정 과정까지

정부는 지난 9월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을 때부터 ‘파병 불가피론’이 대세였다. 이 과정에서 표출된 김진표 경제부총리와 한승주 주미대사의 파병지지 발언도 여론을 환기시키는 성격이 짙었다.

문제는 내년 총선을 앞둔 여론의 향배 부분. 노 대통령 및 신당 지지층이 파병반대 성향이 짙어 자칫 섣부른 파병 결정은 총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정치적 이유가 제기됐다. 더구나 10월 초에 불거진 노 대통령의 재신임 파문으로 이라크 파병 문제는 더욱 장기 과제로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다 한미 정상회담 일정이 잡히면서 분위기는 조기 결정으로 급선회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압력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10월8일 동남아 순방계획에서 돌연 한국을 제외했기 때문. 이에 나종일 안보보좌관과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가 12일 급히 미국으로 날아가고, 한 주미 대사도 15일 급거 귀국해 노 대통령에게 미국 조야의 내부 기류를 전달하는 등 청와대 안팎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때마침 주춤주춤하던 미국의 대 이라크 결의안이 러시아측의 중재로 안보리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정부는 이를 명분으로 손쉽게 파병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실질적인 대북 방안 얻어내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파병결정이라는 ‘선 제스처’를 취하는 모양새를 갖췄기 때문에 이제는 미국측이 화답할 차례다. 이라크 파병 결정은 그 자체로 종결된 사안이 아닌 데다 북한 핵,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 등 각종 현안과 직ㆍ간접으로 연관돼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은 그간 한반도 안보 상황을 파병 결정의 최대 변수로 꼽아 왔던 터라 미국 측에 대북 문제와 관련한 실제적 이익을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셈이다.

한미간에 막후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돼온 것은 ▦북한의 체제보장 및 안보우려 해소에 대한 미측의 전향적 조치 ▦이를 통한 제2차 6자 회담의 조기 성사 ▦한강 이북 주한미군 제2사단 재배치의 속도조절 등이다. 이런 요소들이 전투병의 규모를 비롯, 이라크 파병부대 성격ㆍ형태ㆍ시기 등과 맞물려 논의될 예정이지만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세부적인 것은 양국간 중ㆍ장기적 실무협의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또 대북 문┸?이어 경제적인 효과도 노려봄 직하다. 한미 양국간 동맹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 측면은 분명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대 한국 투자 환경을 우호적으로 재정립한 호재가 된다. 또 자동차 등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을 상당부분 완화시키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다.


끝나지 않는 파병 찬반 공방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당장 정치권부터 정부 결정에 순순히 응할 것 같지 않다. 여기에는 내년 총선과 관련한 이해 득실 계산도 작용하고 있다. 파병 찬성쪽에 서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한나라당부터가 좀 묘한 반응이다.

한나라당은 찬반 표명 없이 “정부가 파병 부대의 구체적 임무 및 규모 등을 밝히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섰다. 최병렬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 전모를 국민에게 얘기하고, 통합신당이 분명한 지지의사를 밝히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1차 파병 때와 같이 섣불리 나섰다가 ‘전쟁광 당’이란 질타를 받을까 봐 슬쩍 비켜서 있겠다는 계산에서다. 더불어 정부와 통합신당에게 화살을 돌려 아예 이 문제에서는 발을 빼겠다는 생각도 하는 듯 하다.

민주당은 찬반 표명은 유보한 채 정부의 결정을 졸속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박상천 대표는 “전투병 파병은 안 된다는 의견이 많지만 정부안을 보고 최종 당론을 정하겠다”고 밝혔으며, 김성순 대변인도 “국민에게 한마디 설명 없이 쫓기듯 발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파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인 의원들은 정부가 전투병 파병을 일찌감치 결정해놓고도 이를 숨긴 채 여론몰이를 해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자민련은 파병과 관련해서는 확실하게 정부 편이다. 유운영 대변인은 “정부의 결정을 환영하며 적극 지지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난감한 쪽은 역시 통합신당. 진보적인 소속 의원 성향에 따라 파병 반대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들리고 있다. 임종석 의원은 ‘파병동의안 가결시 즉각 의원직 사퇴’를 선언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반대론이 행동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김원기 주비위원장은 “정부 결정이 그다지 무리한 것 같지 않아 반대하지 않을 뿐더러 내부의견도 찬성 쪽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해 찬성쪽으로 당론을 모아갈 것임을 시사했지만, 반대론자인 김성호 의원은 “반대가 다수를 이루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일부에서는 “청와대가 당과 사전 협의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들러리냐”고 반발하는 등 당과의 의견 조율 없이 결정된 청와대 방침에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물론 진보 성향의 표를 의식한 총선용 색깔내기도 포함돼 있다. 현재까지는 전투병 파병 반대론이 우세한 편이라 국회에서는 자유투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파병 반대쪽에 서 있는 시민단체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파병저지를 위한 국민서명운동에 들어가는 것을 포함해 물리적 행동계획도 세워 놓은 상태다. 또 총선과 연계한 낙선운동에 이 문제를 결부시킬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어 찬성 쪽인 한나라당 의원들의 행동 반경을 위축시키고 있다. 찬성 의원들이 몸사리기에 나설 경우 파병의 국회동의안 처리도 불투명해질 수 있다.

한편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37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이라크 파병반대 국민행동은 노 대통령의 불신임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염영남기자


입력시간 : 2003-10-21 15:16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