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로고의 힘 "짜릿하죠"


후배 녀석 하나가 취직을 하고 첫 월급을 타자마자 달려간 곳은 백화점이었다. 그 동안 낳고 기르느라 허리가 휜 부모님을 위한 선물을 사러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목도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소위 명품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목도리를 척 하니 걸치고 나타난 녀석의 표정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포만감으로 가득했다.

“겨우 이걸 사느라고 피같은 돈을 썼단 말이야? 만원짜리하고 별로 차이도 없어보이는데.” 나의 가벼운 비난에 녀석은 고개를 내저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형이 뭘 몰라서 그래. 바람이 불 때마다 목도리 끝에 붙은 상품 로고가 언뜻언뜻 보일 때의 그 쾌감. 아, 짜릿하지. 목도리로 시작했으니까 다음엔 구두, 가방, 시계, 양복으로 착착 순서를 밟아 나가는거야. 나이트에 가도 여자들이 명품은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니까. 눈을 착 내리깔고서 안보는 척 하면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다니까.” 녀석의 일장연설에 할말을 잃었다.

내가 그 나이 때 번 돈을 쪼개 적금을 붓고 미래를 계획했던 일들을 한마디도 해줄 수 없었다. 그만큼 녀석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내가 학창시절에도 그랬다. 누군가 나이키 신발을 신고 나타나면 얼마 후 하나 둘씩 그런 운동화를 장만했고 그걸 사달라고 애꿎은 부모님을 들들 볶아댔다. 그저 신발 하나로 만족했던 예전의 아이들에 비해 요즘 애들은 모자며 가방까지 확실히 드러나는 브랜드 제품에 열광한다. 비싼 만큼 제값을 한다는 믿음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그 브랜드의 로고가 잡혀지는 선망어린 시선에서 느끼는 우월감을 더 믿는 것 같다. 그래서 단돈 만원짜리부터 기십만원을 훌쩍 넘는, 짝퉁이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고가인 짝퉁까지 거리에 넘쳐나고 있다.

만원짜리 스웨터 가슴 언저리에 말이나 자전거 하나가 새겨지면 당장에 그 사람의 품격은 달라진다. 로고가 주는 압도감이 만원이라는 진정한 값어치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로고가 주는 신뢰감, 선호도, 동경의 힘은 강하고 무섭다. 사람들은 누군가 방송국 로고가 찍혀진 수첩을 들고 PD 행세를 하면 그대로 믿어버린다.

실제로 그런 사기 사건에 휘말려서 신세 망쳤다는 연예인 지망생들의 얘기도 있었다. 누군가 수첩을 주웠건, 돈을 주고 가짜 로고를 만들어서 붙였던 당장에 그 로고가 주는 힘에 올바른 판단을 접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청와대 로고가 새겨진 시계며 기념품 등을 내세워 사정팀 국장 행세를 한 사람이 수 억원의 돈을 사기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판매점에서 청와대 로고가 새겨진 시계 등을 구입해서 사람들에게 돌렸는데 사람들은 시계에 청와대를 상징하는 로고가 새겨져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도 쉽고 나약하게 그의 거짓말에 넘어가 버렸다.

이 사건 때문에 청와대 기념품 판매점인 ‘효자동 사랑방’은 청와대 문양이 들어간 시계 등의 물품 판매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소위 청와대 시계를 기념으로 간직하려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가는데 언제까지 안 팔 수도 없을 것이다. 나이든 촌부가 모처럼 청와대를 구경하고 기념품을 사가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소박한 기쁨을 계속 빼앗을 수도 없다. 뭔가 기념이 될만한 것을 팔긴 팔아야겠는데 또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기사건이 일어날까 봐 고민도 될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다. 맨날 시계나 볼펜같은 구태의연한 기념품에 연연하지 말고 뭔가 새로운 기념품을 만들어야 한다. 시계처럼 사기 사건에 악용되지도 않으면서 기념으로 사가지고 가서 실생활에 써먹을 수 있는 기념품, 청와대 로고가 새겨진 콘돔을 만들면 어떨까?

아무리 양쪽에 봉황이 새겨져 있다고 해도 드러내놓고 자랑하기에는 좀 쑥쓰럽고, 또 청와대라는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로고에 힘입어 새로운 힘(?)을 얻는 괴력이 생길지도 모르고, 에이즈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웃자고 한 얘기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글 것이 아니라 아예 구더기가 생기지 않게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입력시간 : 2003-12-2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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