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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 플릭, 불황 돌파의 새로운 공식?
여성 취향 맞춘 영화, 여심 사로잡으며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



미국 시사주간지 U.S. News & World Report는 얼마 전 불황기에도 흔들림 없는 틈새 사업 분야를 선정해 관심을 모았다. 한국에서도 익숙한 ‘취업’ 관련 사업들이 수위를 차지한 것은 역시 전 세계적인 불황을 실감케 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10위까지의 순위 중 4, 5, 6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콘돔’, ‘초콜릿’, ‘로맨스소설’이다. 이들 아이템은 ‘불황’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랑’이라는 판타지(또는 현실도피)를 통해 잊게 해준다는 공통점이 꾸준한 인기의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로맨스소설의 인기는 예삿일이 아니다. 80년대 여학생들의 ‘성서’와도 같았던 하이틴 로맨스는 약간의 변주를 거쳐 연령대까지 확장하며 지금까지도 여전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명 ‘할리퀸 로맨스’로 유명한 세계 최대 로맨스소설 출판업체 ‘할리퀸’은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300만 달러나 증가하는 호조세를 띠었다.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진 ‘칙 릿(Chik-lit)’은 이미 대중문화 전반을 점령한 지 오래다. 칙 릿은 그 자체로서의 재미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패션 등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문화와 결합되어 대중의 잠재된 욕망을 부추기고 유혹하는 유력한 매체가 되고 있다. 칙 릿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꽃띠문학’ 명명 시도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근원적 속성 탓일 것이다.

칙 릿을 스크린에 옮긴 ‘브리짓 존스의 일기’, ‘섹스 앤 더 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의 영화들의 성공은 새로운 영화관객층을 발견하게 해주었다.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바로 여성관객층의 취향에 초점을 맞춘 ‘칙 플릭’(Chick flick, 여자를 뜻하는 Chick과 영화를 뜻하는 flick의 합성어)이 불황기를 돌파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칙 릿’ 영화들이 주로 로맨틱 코미디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칙 플릭은 다소 신파적인, 정통 멜로의 성격이 강하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눈물로 풀어냈던 ‘이프 온리’와 ‘노트북’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영화 ‘너는 내 운명’이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도 한국형 칙 플릭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영화들은 여성 관객에게 특히 주효한 ‘눈물’과 ‘사랑’에 초점을 맞추며 특화된 관객층을 극장에 모으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칙 플릭은 칙 릿처럼 자본주의적 속성에 솔직하게 다가간다는 점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개봉한 ‘쇼퍼홀릭’은 제목 그대로 쇼핑 중독자 이야기다. 주인공인 이십 대 초반의 여자는 카드빚을 갚기 위해 자기와 별 상관도 없는 경제전문 잡지에 입사해 여러 가지 해프닝을 만들어낸다. 주체할 수 없는 물욕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카드를 꺼내 ‘긋고야 마는’ 여자의 모습에 남자관객들은 한심해 하며 짜증을 낼 만도 하다.

실제로 영화 상영 도중 나오는 남자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영화 속 쇼퍼홀릭이 “말랑한 버터가 따뜻한 토스트 위에서 녹아내리는” 쇼핑의 행복감에 동의하는 여자관객들 역시 적지 않다. 즐거울 것이 없는 세상, ‘지름신의 강림’(주체할 수 없는 소비 욕구를 뜻하는 인터넷 용어)에 순응하는 것 또한 불황기를 견뎌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달 초 개봉한 ‘신부들의 전쟁’은 한날 한시에 잡힌 결혼식을 둘러싸고 친구 사이인 두 여자가 벌이는 이전투구를 그린다. 사이좋았던 두 친구가 우연히 같은 날 결혼식이 잡혀 우정에 금이 간다는 해프닝을 한 시간 반 동안 ‘우려먹는’ 칙 플릭이다. 이 영화는 일단 단순한 설정도 문제지만, 칙 플릭으로서 여성관객들에게 그들만의 재미를 느끼게 해줄지도 의문이다.



(위에서부터) 영화 '쇼퍼홀릭', '신부들의 전쟁', '미쓰 루시힐'


로맨틱 코미디용 두 여배우와 할리우드 특유의 해피엔딩은 어느 정도 장르 팬들을 기대케 하지만, 우정-다툼-화해의 전형적 도식 아래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과 연기들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결혼‘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난장판을 벌이며 결혼식을 위해 ‘오바’하는 캐릭터들과 설정에 재미있어 할 여성관객이 많을지는 미지수다.

한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그 스스로 칙 릿 캐릭터의 현신이 됐던 르네 젤위거는 ‘미쓰 루시힐’을 통해 또 한 번 칙 플릭의 진화된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여성관객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캐릭터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쓰 루시힐’의 주인공은 다르다. 현실의 사회상을 반영하듯 경제적 능력을 갖춘, 자신감 있는 골드미스가 칙 플릭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루저’라는 보편적 감성보다는 ‘알파걸’과 휴머니즘을 결합하며 새로운 여성상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계집애들이나 보는 영화’란 뜻을 지닌 경멸 섞인 속어였던 칙 플릭은 이제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잡으며 근래에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미리엄 웹스터 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칙 릿을 기반으로 했던 영화의 경우와는 달리, 칙 플릭은 풀어야 할 과제들이 많아보인다. 우선 하나의 장르로서 칙 플릭은 기존의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와는 다른 그만의 특색이 있어야 한다.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도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의 풍부한 인간적 매력들이 칙 플릭에서는 그냥 피상적이고 소모적인 캐릭터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많다.

한때 칙 릿은 ‘된장녀’ 담론을 일으키며 사회적으로 여성주의 논의의 생산적인 통로를 연 바 있다. 시애틀 포스트-인텔리전서의 션 액스메이커는 지금의 트렌디한 칙 플릭 ‘현상’을 지적하며, 칙 플릭이 불황기 이후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장르로서 여성관객들에게 재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밀한 개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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