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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 패러다임의 변화
기술의 일반화로 디자인 통해 차별화 신수요 창출 박차




김청환기자 chk@hk.co.kr



아이리버 '엠플레이어'
서울시내의 한 전자제품 판매 전시장. 세탁기 위에 올려져 있는 LCD광고판이 눈에 띈다. 쉴새 없이 광고 영상을 쏟아내는 모니터는 의외로 얇고 가벼운 모양이다. 문양 역시 일반적인 가전회사에서 나오는 것과 다르다. 뒷면을 봐도 다르다. 전선이 하나뿐이다.

역시나 이 제품은 기성 전자회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디자인 외주와 컨설팅을 주로 하던 디자인하우스가 제품을 직접 만들어 납품한 것이다. 이 회사는 디자인을 먼저 한 뒤 일반화한 기술을 적용해 제품을 만들어 냈다.

산업디자인의 경향이 기술 중심에서 디자인 중심으로 급속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기술력과 기능을 포장하는 수단 정도로 여겨왔던 디자인이 제조산업의 중심에 서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에 최우선을 두고 일반화한 기술력을 적용하는 제조기업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기술의 일반화는 원천기술이 없는 기업도 디자인을 통해 신수요를 창출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다. 제조산업의 포화로 차별화의 필요성이 커진 시장환경 역시 디자인을 산업의 중심으로 만들게 했다. 산업디자인에서 기술보다 중시되는 디자인의 시대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문준기 산업디자이너협회 회장은 “원천기술의 시대에서 제너럴 테크놀로지화(기술의 일반화)로 넘어오면서 디자인이 비교경쟁력의 수단이 되고 있다”며 “시장과 산업의 성숙화와 더불어 디자인과 산업의 융복합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디자인의 신수요 창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디자인하우스의 변신이다. 주로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의뢰를 받아 디자인 용역을 하던 디자인기업들이 자체 디자인 상품을 제조까지 해 내놓는 비중을 대폭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 외주보다 자체 디자인 제품의 제조∙유통을 대폭 확대하는 디자인 기업이 있다. 외부 디자인 용역을 주로 했던 M.I. 디자인은 매출의 절반 가량을 자체 제조 상품에서 얻고 있다. 이 회사는 자체디자인에 생산까지 한 광고용 모니터를 LG전자와 SK케미칼에 납품하고 있다.

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제품은 일반적인 제품과 어떻게 다를까. 이 회사가 만든 LCD모니터의 전선은 하나뿐이다. USB카드와 SD카드를 이용해 콘텐츠를 연결하는 선을 줄였다. 전원을 연결하는 선 하나만 있으면 되도록 한 것이다. 기존 벽걸이 모니터의 경우 라인이 벽면에 3개 이상 연결돼있다. LCD기판 역시 패널을 1/3로 줄였다.

그렇다고 이 회사가 원천기술을 보유한 것은 아니다. 디자인을 먼저하고 이에 중심을 두고 그에 맞는 부품을 선택하고 주문한 것뿐이다. 자신들의 원천기술이나 부품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기성 전자회사들이 하기 힘든 시도다. 슬림하고 날렵한 디자인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 기업의 강점이자 경쟁력이다.

외주사의 디자인 컨설팅과 용역을 주로 하는 디자인하우스에서 출발한 이 회사가 대량생산제품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회사는 4년 전 자체 디자인의 애견급수기를 개발해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출품하며 디자인의 가치와 디자인 제품 생산력을 인정받았다.

전자제품의 디자인 외주를 하다 자체디자인 가구를 직접 생산하는 디자인 기업도 있다. 코다스디자인은 지난 2006년 1월부터 사내 벤처를 만들어 두닷이라는 상표를 내세워 가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생산, 유통까지 하고 있다.

이 회사의 디자인 외주∙용역 대 생산의 비중은 현재 매출액 기준 6:4정도다. 사내벤처로 출발한 디자인하우스의 자체생산 부문이 전통적인 디자인 외주만큼의 수익을 회사에 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에어컨을 비롯한 전자제품 디자인 외주사에서 가구회사로의 변신은 날로 속도를 더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역량인 디자인 경쟁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이상욱 코다스 이사는 “디자인 용역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정체된 성장을 일으키기 위해 생산을 시작한 것”이라며 “고유의 디자인 영역을 유지하면서 자기 개발 아이템 사업부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자인하우스 모태 디자인 제조기업으로

디자인하우스에서 출발한 디자인 기업이 제조기업으로 분사해 나름의 영역을 구축한 경우도 있다. 산업디자이너인 김영세 씨가 운영하는 이노디자인은 MP3플레이어인 아이리버 등의 디자인 외주사로 명성을 날리다 이 회사와의 결별 이후 이노맨을 만들어 자체 MP3플레이어를 생산했다. 이후 이노맨은 외국자본의 투자를 받아 최근 디자인 중심의 제조사로 독립했다.

이 회사는 현재 화장품갑 모양의 MP3플레이어, 선글라스형 포터블 엔터테인먼트 기기, 접히는 선풍기를 비롯한 각종 혁신적인 자체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판매까지 하고 있다. 기술이나 제조중심의 IT회사에서 만들기 힘든 각종 실험적인 제품으로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노디자인 역시 전자부품 및 LED 조명 전문업체인 유양디앤유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고, LED 조명 사업을 공동 추진키로 하는 등 디자인 외주를 계속하고 있으며 소량의 디자인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 회사는 최근 김영세 사장의 태극문양 디자인을 침구회사인 이브자리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노디자인은 ‘LG 스마트폰’, ‘디오스 냉장고’, ‘삼성 애니콜’ 등 국내 대기업의 히트 상품들을 디자인해왔다.



(위) M.I 디자인 'LCD POP' (아래) 기아차 콘셉트카 Soul'ster


자체 디자인팀을 보유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왜 디자인 기업을 찾았던 것일까. 이노디자인은 기술력 중심으로 사고하고 디자인을 하는 기존 전자제품의 틀을 뛰어넘는 발상으로 이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요창출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디자인’의 성공이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경우도 있다. 디자인에 올인하는 IT회사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서도 2003년 100여개에 달했으나 현재 5개(아이리버, 삼성, 엘지, 코원, 엠피오)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한 MP3플레이어 업계가 대표적인 예.

MP3플레이어 시장의 레드오션화로 위기에 처했던 아이리버(옛 레인콤)도 디자인으로 다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당초 레인콤은 2001년 ‘아이리버’브랜드로 시장에 진출해 2004년 매출액 4540억원으로 매출액기준 국내 100대 기업에 진입하는 신화를 이룩했다. 이 회사의 히트상품은 삼각기둥∙목걸이형 디자인의 MP3플레이어 등이었다. 디자인 경쟁력으로 성공한 셈. 그러나, 이후 애플 아이팟의 가격인하 영향 등으로 매출액 100억 원대의 적자기업이 되고 말았다. 레인콤의 2007년 매출액은 1000억 원대로 2004년에 비해 1/4 이상 급감했다.

이 기업을 살린 것은 다시 ‘디자인’이었다. 자체 디자인팀이 디자인한 미키마우스 MP3플레이어가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레인콤은 2007년 엠 플레이어 등장 이후 흑자로 전환해 지난해 2068억원 매출에 6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미키마우스 모양의 앙증맞은 디자인을 중심으로 LCD창과 부가기능 등을 없앤 과감한 디자인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리버의 올해 1/4분기 매출액은 432억 7200만 원으로 전년동기에 비해 3% 감소했고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적자로 전환됐다. 아이리버는 다시 디자인으로 승부를 건다는 생각이다. 현재 KT 쿡(QOOK)과의 제휴로 자체 디자인팀이 디자인한 핸드 셋과 본체가 결합된 독특한 피라미드 모양의 인터넷 집전화기를 개발하고 있다.

아이리버 관계자는 “디자인 외주를 주면 편한 면이 있지만 가장 제품과 회사를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기 때문에 자체 디자인으로 선회한 것”이라며 “엠 플레이어 이후 검증 받은 디자인 파워로 승부를 걸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기업도 디자인 강화

전통적인 기술 중심의 기업들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불황의 파고를 ‘디자인’으로 넘으려는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들은 실제 디자인 경영을 도입한 이후 톡톡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혁신적인 디자인의 ‘쏘울’로 매출상승을 보이고 있는 기아자동차가 대표적인 예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지난 2006년 9월 프랑스 파리모터쇼에서 ‘디자인 경영’을 선언했다. 이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불리는 피터 슈라이어를 디자인 총괄담당(CDO)으로 영입하며 디자인 경영을 본격화했다. 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건설한 유럽총괄법인(KME) 신사옥에 기아차 단독의 유럽디자인 센터를 만들었다.

‘쏘울’은 지난 2007년 4월 한국 산업디자이너협회가 개최한 디자인 세미나에서 제시한 ‘직선의 단순화’라는 디자인 방향의 결정체다.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라인’이라는 명제는 이후 출시된 신차들이 기아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요한 지침이 됐다.

디자인 단일화로 공통된 디자인 이미지를 주는 것 역시 주효했다. 지난해 6월 출시된 로체 이노베이션 등의 패밀리 룩은 호랑이 코와 입을 모티브로 한 라디에이터 그릴의 디자인으로 동물의 인상을 형상화해 제품 특성을 강조했다.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의 코와 입모양처럼 상하단 선의 가운데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새다.

디자인 경영은 실제로 효과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까지 22~23%에 머무르던 기아차의 내수시장 점유율은 30%를 넘어서고 있다.

구본무 LG 회장의 디자인 경영철학 역시 화제다. 전자제품이 주력인 LG디자인은 원래 투박하고 기능 위주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지난 2006년 구 회장이 ‘디자인 경영’을 천명한 이후 이 기업의 경쟁력은 변화하고 있다.

구 회장은 매년 ‘디자인 경영간담회’를 통해 LG의 디자인 성과와 디자인 전략을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등 디자인 경영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2006년에 시작한 ‘디자인 경영간담회’는 올해로 4년째를 맞고 있다.

LG가 지난해 디자인경영에 투자한 금액은 1000억원. LG는 2006년 780억원, 2007년 880억원에 이어 디자인 경영을 위해 매년 100억원 이상 투자금액을 늘렸다. 2007년 640명이던 디자인 인력은 지난해 700명 규모로 늘렸다.

IT부문‘디자인 경영’의 성과도 만만치 않다. LG는 ‘레드 닷 디자인상’, ‘iF 디자인상’을 비롯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168개의 디자인상을 받았다. 수상부문은 TV, 휴대폰, 모니터, DVD 플레이어 등 IT·전자제품이다.

LG전자 휴대폰 사업은 최근 글로벌 톱3로 도약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디자인이 실적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LG전자가 3월말 폴더전면에 220개 LED를 적용해 사용자가 이모티콘과 무늬를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도록 제작한 ‘롤리 팝’폰, 지난해 6월 스테인리스(stainless) 소재를 이용한 디자인으로 출시한 ‘샤인(shine)’ 디오스(DIOS)는 5월 초에 누적 판매량 1만대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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