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마이클 잭슨 등 관련보도 미디어의 악습 거리낌 없이 드러내

각종 오보와 법정공방으로 얼룩진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보며, 죽음조차 상품화시키는 미디어의 오래된 용병술에 새삼 우울해진다. 왜 우리는 이토록 죽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가. 죽음에 대한 이 가공할 집단적 결례는 세계적 트렌드일까.

타인의 죽음을 통고받은 충격 속에서 어떤 감정의 의상을 입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현대인은 미처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미디어의 언어를 흡수한다. 죽음을 다루는 미디어의 문법은 컨베이어벨트의 생산라인처럼 기계화되었다.

‘충격, ○○○ 타계하다’라는 단순 보도에서 시작된 죽음의 수사학은 ‘사인규명에 대한 각종억측’을 흥미위주로 보도한 후 당사자가 죽은 지 만 하루도 안 되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약물복용으로 돌연사’등의 전형적인 ‘판정’으로 치닫는다. 부검결과를 확인하고 분석하는 데 드는 실제시간은 중요치 않단다.

파파라치화된 미디어의 ‘죽음의 관리술’은 가장 나쁜 의혹을 ‘기정사실’로 가공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현대사회의 죽음은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너무 빨리 정리되고 요약되고 이용된다.

타인의 죽음을 보도하는 미디어의 노출증은 일시적으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지만 미디어 스스로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행위다. 특히 최근 유명인사들의 장례식 보도관행은 죽음 자체를 타자화시키는 미디어의 악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연예인의 장례식에서 동료 연예인들의 사진은 왜 그렇게 정신없이 찍어대는가.

슬퍼하느라 눈이 짓물러 화장도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장례식 때 물광메이크업을 해야 하는가. 이제 연예인들은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러 가는 길에까지 ‘코디’를 신경써야 하나. 장례식을 취재하는 것인지 ‘별들의 총출동’을 취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故 장자연씨의 장례식 때는 정작 무명탤런트였던 그녀보다도 장례식에 혜성처럼 등장한 F4의 ‘간지’에 초점을 맞추는 듯한 보도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안타깝게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의 유언 아닌 유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의식불명의 상태에서도 자신의 모습이 무방비상태로 전시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제발, 파파라치는, 파파라치는 안 돼…….” 그러나 파파라치는 시체 안치실까지 숨어들어 그의 죽음을 더럽혔다.

존엄사라는 개념 자체가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병원에서의 존엄사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엄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대부분의 장례식이 병원에서 치러지는 요즘 세상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죽음이란 거의 불가능한 과제일까.

현대인은 그 어느때보다도 다채로운 죽음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TV에서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보험 하나 없이 무책임하게 죽어서는 안된다’는 논조의 보험 광고가 채널마다 성업 중이고, 각종 케이블 TV를 통해 24시간 방영되는 범죄자 색출형 ‘미드’ 역시 ‘죽음’이라는 테마를 빼면 시체다.

‘CSI’식으로 과학적으로 분석되는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죽음에 속하지만, 부검을 통해 사인을 규명하는 현대의학의 권력 속에서는 누구도 ‘죽음조차 분석 당해야 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죽을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한 차분한 예행연습을 할 기회가 없다.

죽음을 견디고 치러내야 할 당사자들은 미처 ‘존엄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너무도 비인간적인 죽음의 관리술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내맡겨야 한다. 이 코드화된 죽음의 절차 속에서 진정한 애도의 공간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는 점차 죽음자체에 둔감해지는 감각의 마비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처하는 집단적인 행동양식 중 최근 급부상한 신조어가 바로 ‘지못미’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의 약어인 ‘지못미’는 ‘남대문의 죽음’ 이후 급격히 확산된 집단적 애도의 아비투스다. 흥미로운 것은 ‘지못미’의 퍼레이드를 벌이며 인터넷을 달구는 네티즌 중 대다수가, 정작 고인이 살아있을 때는 그에게 무관심했거나 심지어 고인을 극도로 혐오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심리 밑바닥에는 애초에 그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의 친밀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은폐된다. 이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심심찮게 희화화되어 쓰이는 ‘지못미’는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사회적) 죽음을 방치한 것에 대한 집단적 죄책감을 은폐하는 면죄부가 아닐까.

물론 ‘지못미’를 발화할 때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하나같이 다를 것이다. 문제는 ‘지못미’의 수사학만으로는 우리가 망자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다는 엄연한 진실이다. 그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겠다는 집단 심리는 소름끼치지 않는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 서둘러 죄의식을 갈무리하는 사후적 자기관리보다는, 타인의 죽음 이전에 타인의 삶 자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죽음이 이토록 존엄과는 거리가 멀어진 배경에는 타인의 삶 자체에 대한 손쉬운 판단과 성급한 단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시뮬레이션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너무 많은 변형과 복잡한 포장 단계를 거친 미디어의 죽음은 죽음의 실체로부터 우리를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죽음의 대리체험은 어차피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죽음을 다루는 존엄한 방식, 아니 죽음과 진정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죽을 때에 죽지 않도록 죽기 전에 미리 죽어두어라”라고 했던 엥겔스의 말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죽음을 치열하게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아인슈타인도 항상 주목받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던지 이런 유언을 남겼다. “죽은 후에도 8시간 정도는 푹 쉬고 싶으니까 그 후에 사람들에게 알릴 것.”베토벤은 죽어서도, 생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을 갈망했다.

베토벤의 유언은 이것이었다. “천국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마이클 잭슨은 그토록 어린 나이부터 세계적인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가 그토록 꿈꿨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버나드 쇼는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을 유언으로 남겼다.

“다시 산다면 나는, 내가 될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