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책임감 내려놓고 사랑스러워진 아저씨 전성시대

(좌) <내조의 여왕> '태봉이' 윤상현
(우 위쪽)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오빠밴드>
(우 아래)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

지금 TV는 ‘아저씨 전성시대’다. 작년부터 등장한 ‘아저씨돌(아저씨+아이돌)’들이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 중이고, <남자의 자격>, <오빠밴드> 등 아예 ‘중년 남성’을 주인공이자 주제로 삼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인기를 누린다.

중년 남성은 트렌디 드라마에서까지 로맨스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내조의 여왕>의 ‘태봉이’ 윤상현, <결혼 못하는 남자>의 ‘초식남’ 지진희는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아저씨 열풍을 이어 받았다.

사랑받는 아저씨 캐릭터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가부장으로서의 습관이 배어 완고하기도 하고, 각박한 현실에 닳고 닳은 치졸한 면을 보이기도 한다. 감각은 떨어지며 그렇다고 대단히 지혜롭지도 않다. 그런데 정이 간다.

솔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변명과 훈계, 고집 부리기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받아들인 ‘상태’다. 일종의 자조(自嘲) 혹은 애교이며, 농담의 한 버전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여느 중년 남자들처럼 아등바등하고 관성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자신과 삶에 조금은 초탈해 있다.

한국사회의 보편적 아저씨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비틀 때 ‘아저씨’는 사랑스러워진다. 아이돌 그룹의 춤을 따라하고 밴드 연습을 하는 등 어른스럽지 않은‘로망’들을 기꺼이 실행하는‘아저씨’들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권위와 책임감, 현실이 지워놓은 무거운 짐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재미없고 꽉 막힌 면들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버림으로써 그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발 빠른 마케팅 전략은 ‘꽃중년’ 프레임을 퍼뜨리며 현실 속 아저씨들도 외모를 가꿈으로써 사랑스러운‘아저씨’가 될 수 있다고 꼬이고 있지만, 관건은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악하는 것이다. 한계를 인정하고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열 때 아저씨의 치명적인 단점들은 애교이자 농담이 된다.

이는 아저씨들이 대중문화의 ‘핫’한 코드로서 보여질 수 있는 방법일 뿐 아니라, 아저씨 스스로 ‘핫’해질 수 있는 길이다. 현실 속 ‘섹시한’ 아저씨들을 인터뷰한 책 <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의 저자 이현, 홍은미는 이들의 매력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 나아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했을 때 행복한지 아는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본업 외에 록밴드를 결성하고,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하고, 색소폰을 불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자신을 찾은 중년 남성들의 사례가 실려 있다.

TV에서건 현실에서건 매력적인 ‘아저씨’들에 주목하는 의의는 그들이 ‘소수자’라는 데 있다. <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는 지금의 중년 남성들이 “1980~9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 산업역군으로서 근면성실하게 살아온 세대”라고 지적한다. 감성을 거세당한 채 꾸역꾸역 벌어먹고, 먹이는 데에 매진한 그들이 겪는 외로움과 허무함을 안쓰럽게 여기며 이제라도 행복하게 살도록 독려한다.

이런 교훈은 나아가 언젠가 중년이 될 젊은 세대에게도 유효하다. 저자 이현은 이 책을 다 쓴 후 10년간의 직장 생활을 청산했다. 활기 넘치는 중년 남성들을 만나며 자신이 더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밥벌이에 치여 무력해진 탓이었다.‘아저씨’들처럼 매력적이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아저씨 전성시대, 유쾌하게 진화한 중년 남성의 모습은 답답하고 불안한 한국사회가 반한 지혜로운 이상형이다.

꿈과 열정, 낭만을 연주해요
아저씨 록밴드 '시월산수'


직장인 밴드 콘테스트서 연달아 수상하며 이름 알려

"시와 달과 산과 물에 취해 치기 어린 시구라도 읊조리고 풍류를 안다"는 뜻을 지닌 '시월산수(時月山水)'는 40~50대 아저씨들로 구성된 록밴드다. 인하대학교 밴드부 '인드키'에서 활동했던 원태연, 유병훈, 김기욱을 주축으로 2007년 만들어졌다.

이광호, 이충렬, 이기원 등 나머지 멤버들은 인맥과 인터넷을 통해 충원했다. 순수한 취미 밴드로 멤버들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업을 하는 이가 있고, 보험회사와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는 이도 있다. 작년 큰 규모의 '직장인밴드 콘테스트'들에서 연달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의 메인 인터뷰이이기도 하다.

지난 5일 서울시 마포구 중동의 한 연습실에서 이 시대가 원하는 진짜 '아저씨'들을 만났다. 음악을 향한 어린 시절의 꿈, '남자'로 살아온 지난날들과 여전한 열정, 온전한 자기 자신을 쏟아 부은 시월산수의 연주가 지금이야말로 분명히 그들의 전성기임을 증언했다.

- 멤버들을 충원할 때 기준은 뭔가요.

이병훈 우선 주량을 봤죠. 적어도 소주 2병이 돼야 해요(웃음). 술 먹고 합주를 해보면 실력이 드러나기도 하고, 단순한 실력보다는 인성을 봅니다.

- 중년이면 사회적 역할이 클 텐데, 틈틈이 밴드 활동까지 하려면 시간 관리 도 필요하고 체력도 좋아야할 것 같아요.

김기욱 지위가 올라갈수록 행동하기보다 사고하는 시간이 많잖아요. 머리가 복잡할때는 음악하는 것이 오히려 충전하는 데 도움을 주죠.

이병훈 다른 직장인들이 술 마실 시간이면 충분히 음악을 할 수 있어요. 이것 자체가 체력 보충이기도 하고요. 저도 밴드 활동하며 더 젊어졌어요(웃음). 또래 친구들이 부동산, 정치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음악 이야기하니까요.

- 그렇다면 젊은 분들과 소통도 더 원활하시겠어요.

이병훈 음악이 윤활유가 되죠. 한때 인도네시아에서 공장을 운영했는데, 처음엔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됐어요.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음악이에요. 어느 날 함께 식당에 갔다가 그 곳 무대에서 제가 기타 연주를 선보인 이후로 관계가 개선됐죠. 종종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시월산수의 음악적 지향은 뭔가요.

이충렬 1970~80년대 록밴드 음악을 기본으로 해요. 90년대 조용필, 사랑과 평화 등등의 음악도 좋아하고요.

이광호 밴드 활동 자체를 좋아하고, 여러 명이 어울려 하는 것이니 특정 장르를 고집하진 않아요. 가끔은 요즘 유행하는'뽕짝'을 선보이기도 하고요.

-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연주 동영상을 찾아봤는데 관객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이병훈 그런 순간이 낭만적이죠. 한번은 인천 부평의 길거리에서 즉흥적으로 화음을 넣어 노래한 적이 있는데, 순식간에 많은 분들이 모이셨어요. 어떤 분들은 술을 사와 권하기도 하고.

- 동년배 중에는 그런 낭만을 오래 전에 잊은 분들이 더 많을 텐데요. 그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이병훈 얼마전 두바이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어요. 그도 여느 한국 남성들처럼 열심히 살고 있죠. 이번에 저희가 소개된 책에 이렇게 적어 줬어요."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앞으로 살아갈 날들 재미있게 보내도록 합시다." 그도 책을 읽더니 취미를 갖는 게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냐고 묻기에 정열이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라고 대답해줬어요. 일만 하며 사는 분들 보면 안타깝죠. 정작 쉴 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 스스로 이렇게 사시니 아들딸을 기르는 철학도 다른 아버지들과 다를 것 같은데요.

김기욱 제 아이들은 8살, 4살인데 어렸을 때 꿈을 갖고 거기에 미쳐보라고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한번 해보면 사회 생활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음악 했던 사람들은 일도 독창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입사할때 면접에서 "상사나 동료와 충돌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에" 밴드를 할 때는 그런 일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겼기 때문에 잘 대처할 수 있다"고 대답했어요. 밴드의 기본이'하모니'거든요.

이병훈 제 아들은 아예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어요. 대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있어요. 그가 처음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좀 당혹하기도 했고, 나처럼 취미로 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결정을 지지해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 요즘 대중문화에서 '아저씨'가 뜨고 있어요. 아저씨의 매력은 뭘까요.

김기욱 '폴 포츠'의 매력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뛰어난 실력으로 반전을 이끌어냈잖아요. 그가 만약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생겼다면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월산수도 처음엔"아저씨네"하다가 음악을 듣고 반하는 분들이 많아요(웃음).

이병훈 감성이 촉촉하다는 것도 장점이죠. 30대에는 감성이 메마르다가 산전수전 겪으면서 40대가 되면 그 세월이 다 녹아들어 감성이 좋아지거든요.

-' 시월산수'는 멤버 각자에게 무엇인가요.

이광호 저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는 매개죠.

이병훈 주유소요. 기름이 떨어지면 충전 하는(웃음).

원태연 저에겐 시월산수가 곧'음악'이 에요. 타임머신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연주할 때는 20~30년 전으로 돌아가거든요.

이충렬 휴게소죠. 내 인생이 단 몇 분이 라도 쉴 수 있는.

김기욱 물이요. 있을 땐 그 중요성을 잘 모르는데, 없으면 갈증나고 갈구하게 돼요.

이기원 '봉'입니다. 제가 올해 마흔인데 여기선 막내라 돈 낼 일이 없어요(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