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음정 보정·음색 변조 프로그램 음악의 진정성 논란 불러

오토튠 프로그램 화면

올 9월 11일에 신보 을 발표할 예정인 미국의 거물 힙합 뮤지션 제이-지(Jay-Z)가 얼마 전 신보 발매에 앞서 수록곡 중 하나를 공개했다. 곡의 제목은 통상적으로는 ‘죽거나 살거나(Dead Or Alive)’의 약자로 쓰이지만, 실은 ‘오토튠의 죽음(Death Of Auto-Tune)’이라는 말의 약자다.

곡의 가사에서 그는 티-페인(T-Pain) 등 오토튠을 사용하여 스타가 된 힙합 뮤지션들을 비난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전체에 오토튠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이건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테크놀로지에 대해 그것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우선 질문. 도대체 오토튠이 무엇이길래?

오토튠은 미국의 안타레스 오디오 테크놀로지(Antares Audio Technologies)사에서 개발한 음정 보정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보컬의 음정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다. 그렇다. 정확하게 말이다. 완벽한 음정을 위해 수없이 재녹음을 해야 하는 팝 가수들에게 이것이 갖는 의미가 어땠을지 상상이 가능하지 않은가?

오토튠은 즉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성량은 불안한데 이상할 정도로 음정은 정확한 보컬이 담긴 음반들이 쏟아져 나왔다(물론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들도 심심찮게 애용했다).

그런데 이 오토튠에는 다른 기능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음색을 바꾸는 것이다. 즉 목소리를 묘하게 변조시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독특한 음색의 보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서 여러 곳에서 활용되었는데, 앞서 언급한 T-페인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두 번째 오토튠의 기능 역시 최근 한국 대중음악에서 엄청나게 활용되고 있다. 슈퍼주니어의 <쏘리 쏘리>, 빅뱅과 2NE1의 ,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등의 히트곡에서 모두 오토튠 효과가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 기능들이 ‘진지한’ 음악 감상자 혹은 뮤지션들에게 일종의 부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사실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토튠은 첫 번째 기능이건 두 번째 기능이건간에 ‘왜곡’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2009년 2월 ‘오토튠: 어째서 팝 뮤직은 완벽하게 들리는가(Auto-Tune: Why Pop Music Sounds Perfect)’라는 기사를 실은 바 있다.

거기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팝 음반들(기사에 따르면 ‘브리트니 스피어스부터 볼리우드 사운드트랙까지’)의 보컬에 오토튠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 기사에 등장하는 그래미상 수상 경력이 있는 레코딩 엔지니어에 따르면 오토튠 사용은 마치 ‘성형수술’과 같은 것이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한 번 맛을 들이면 끊기 어려운 점까지.

1-오토튠의 죽음을 노래한 제이-지의‘D.O.A’
2-제이-지가 오토튠 사용을 이유로 비판한 티-페인
3-슈퍼주니어
4-2NE1
1-오토튠의 죽음을 노래한 제이-지의'D.O.A'
2-제이-지가 오토튠 사용을 이유로 비판한 티-페인
3-슈퍼주니어
4-2NE1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오토튠은 ‘악’이다. 이는 가수 본연의 실력을 감출뿐더러 왜곡과 변조를 통해 ‘진정한’ 인간의 목소리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한 대중음악웹진에 실린, 오토튠에 대한 격렬한 비판에 따르자면 오토튠 유행은 “똑같은 모양의 감흥 없이 팔랑거리는 음악이 자가 번식으로 세를 넓히”는 것이고 “거부하고픈 독감, 쾌락을 좇는 설레발”이다. 요점은 오토튠이 사악한 사기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이런 구도가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진정한 음악의 대 그 음악을 왜곡하는 자본주의의 사기성 짙은 테크놀로지’ 말이다. ‘진지한’ 대중음악의 담론에서 이러한 대립은 오래된 전통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 밑에 있는 것은 다름아닌 ‘진정성’이라는 이데올로기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음악은 진지한 것과 평범한 것으로, 진실한 것과 사기로, 반항하는 음악과 순응하는 음악으로, 대량 생산된 음악과 그것을 거부하는 음악으로 손쉽게 나뉜다.

문제는 진정성에 기댄 이런 주장들이 대개 두 가지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 오토튠을 사용하는 지금 이 시절에도 시류와 유행에 영합하는 싸구려 음악은 많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음정을 맞추려고 수십 번씩 재녹음을 하던 시절에도 그런 곡들은 많았다.

중요한 것은 오토튠을 활용해서 성공한 곡들을 찾는 것이지 오토튠 때문에 엉망이 된 곡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곡들은 너무 많다. 즉 쉽다. 이런 담론은 쉬운 길만 택하려 한다.

둘째로는 범주를 혼동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 간단히 말해 진정성을 기준으로 음악을 둘로 나누는 시각은 거의 대부분 미학적 효과와 윤리적 판단을 혼동한다. 어떤 곡이 음악적으로 ‘형편없을’ 수는 있다(사실은 많은 곡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 곡이 사회적으로 ‘박멸되어야 할’ 곡일까? 이는 사실상 '못생긴 사람은 사악한 사람이다'와 똑같은 논리다.

기계적인 음악이 나쁜 음악인가? 그렇지 않다. 음성을 왜곡한 음악이 나쁜 음악인가? 그렇지 않다. 음정을 조정한 음악이 나쁜 음악인가? 망설이지 마라. 그렇지 않다. 형편없는 음악일 수는 있어도 나쁜 음악은 아니다. 도대체 나쁜 음악이 어디 있는가?

오토튠은 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술이다. 오토튠을 사용한 음악의 유행이 지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질려서이지 대중들이 ‘진지한’ 음악에 목말라서가 아니다. 이를 굳이 강조하고 싶은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음악 담론을 만드는 사람들이란 ‘진정한’ 음악과 ‘거짓된’ 음악을 대립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오토튠에 대한 몇몇 반응들이 그런 편견을 강화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편견을 만든 이들이 바로 그 소위 ‘평론가’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젠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최민우 대중음악평론가